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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김성우(金成雨)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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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3-15 19:08 조회3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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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金成雨)장군은 문숙공 휘 주정(周鼎)의 증손이요 첨의중찬 휘 유(流)의 손자이며 판도판서 휘 윤장(允臧)의 아들로 고려말에 전라우도(全羅右道) 도만호(都萬戶)겸 초토영전사(招討營田事)로 보령지방에 출몰하는 왜구(倭寇)를 소탕하였다

 

◉김성우 장군 행적이 나오는 자료 모음


○金先生憂亭集卷之四 / 雜著

曾祖護軍公墓碣 /1501년 증손 克成 謹誌

嗚呼。我曾祖宣略將軍後領護軍府君金公之墓。皇明弘治十四年九月日。曾孫某奉父命。略述世德。刻諸墓表曰。曾祖諱南浩。字某。光州人。侍中諱周鼎之後。世居光州。由侍中若干世。有諱流。官卒文林郞監察御史。御史生奉翊大夫版圖判書諱允臧。判書生折衝將軍全羅道右道都萬戶諱成雨。以王命討海寇。師過保寧。見樂土爲墟。因家焉。萬戶實生曾祖。由曾祖以下凡四世不遷。金氏遂爲保寧人。曾祖。行高位卑。德厚心廣。處家和以嚴。人或勸其殖貨爲子孫計者。必對曰。富則驕。驕則多怨。富而多怨。取禍之道。嗚呼。若子若孫。有能法曾祖者。庶幾永保家業矣。享年六十四。以疾終于靑蘿里第。葬于睦忠里之馬山原。塋于墓左曰。妣興德陳氏之墓。昌陽君諱斯文之後。克全婦道。閨門肅淸。男五人。長。我顯祖考諱仲老。中甲子武科。丁卯重試。官至司憲府監察。餘皆未顯。女二人。皆歸爲士人妻。我祖考與祖妣及我先妣。皆葬馬山原。登原而望。昭穆有序。壤樹相接。吁其有所感也夫。曾孫克成。雖不敢稱道先德。亦無以垂示後昆。其刻石也。敍其事而無銘焉。弘治十四年九月日。曾孫宣務郞守司憲府監察克成。謹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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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先生憂亭集卷之五 / 附錄 溯源錄

十六世諱 成雨 麗朝折衝將軍。全羅右道都萬戶 卽今之水使兼招討營田事。時倭蒲湖右。以王命討平之。過保寧。樂其土。仍家焉。子孫世居之。公之戰時。神馬自來。故峯曰玉馬。寶劍自出。故洞稱飛刀。入軍海門。而有軍入浦。伏兵花崖。而有伏兵坪。浦石御冠。故有冠巖。賊屍蟻屯。故有蟻坪等地名。入我朝。不仕。公之別廟在墓前。親盡後。禮當祧。而將埋安。則霹雷大作。不得奉遷。如是者以至再度。故尙今權奉。人頌爲異蹟。且曰。當血食而不得故也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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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宗 때의 性理學者로 훗날 退溪 李滉의 性理學에 큰 영향을 끼친 晦齋 李彦迪(1491-1553)과 丙子胡亂 때의 名臣으로 領議政을 지낸 沈之源(1593-1662)이 쓴 金克成의 『憂亭集』과 조선중기 4대 文章家의 한 사람으로 禮曹判書 및 大提學을 지낸 月沙 李廷求(1564-1635)가 지은 金克成의 ‘神道碑’를 비롯하여, ‘金成雨 將軍 墓碑’, 우암 宋時烈(1607-1689)과 明齋 尹拯(1629-1724) 등이 지은 碑文에서도 김성우 장군의 倭寇와의 保寧大捷이 詳細하게 考證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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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國輿地志(1656-1673) 柳馨遠 著에

고려말에 將軍 金成雨가 왜구를 토벌한 공으로 보령에 사패지(賜田)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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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安縣誌

보령지역 최초 지리지인 신안현지(新安縣誌)는 1412년(太宗12)에 간행되었는데 김영모교수 著 “金成雨 評傳”에 소개된 <신안현지> 人物편 金成雨 將軍 기록은 아래와 같다

/麗末以都萬戶招討事奉命討倭師過令時保寧久爲倭寇巢穴公盡滅亡戰時自來故峯曰玉馬寶劍自出故洞稱飛刀洗軍入海門而有軍入浦之名伏兵花厓而有伏兵坪石浦卸冠故有冠巖賊屍屯蟻故有蟻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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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부승지 鄭權이 1748년(영조24)에 增補編著한 미국 하바드대학 엔칭도서관 (Harvard Yenching Library)소장의 <新安縣誌> “古今此土人物”편에 첫 번째로 나오는 金成雨 將軍 記事 역시 同一한 내용이다.

/金成雨 光州人 侍中 周鼎 曾孫 版圖判書 允臧之子 麗末以都萬戶招討事奉命討倭師過令時保寧久爲倭寇巢穴公盡滅亡戰時自來故峯曰玉馬寶劍自出故洞稱飛刀洗軍入海門而有軍入浦之名伏兵花厓而有伏兵坪石浦卸冠故有冠巖賊屍屯蟻故有蟻坪/

 

*山川 古跡편에 冠巖, 軍入浦에 대한 설명이 있다.

 

*보령시에서 2017년에 <국역 신안현지>를 出刊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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輿地圖書(1757-1765)에 김성우장군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輿地圖書 上(한국사료총서 제20집) > 忠淸道>保寧>人物

人物

高麗金成雨 光州人 侍中周鼎之曾孫 版啚判書允臧之子 麗末以都萬戶 招討事 奉命討倭 師過保寧時 保寧久爲倭冠巢穴 公盡勦滅之戰時 神馬自來 故峯稱玉馬 寶劎自出 故洞稱飛刀 軍入海門而有軍入浦之名 兵伏花崖而 有伏兵坪之號浦石 卸冠故有冠巖 賊尸屯蟻故有蟻坪至今人誦爲異蹟公樂其土 于靑蘿故子孫 世人以爲玆土之主人

 

*金成雨를 일러 "世上 사람들이 그를 이 땅의 主人으로 여긴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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輿地圖書 上(한국사료총서 제20집) > 忠淸道> 保寧> 山川

山川

/전략 軍入里浦 金成雨 討倭內浦時引倭于 此浦因名焉 冠巖 金成雨 勦滅倭冠時脫冠于 此因名焉

 

출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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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保寧府地圖(奎章閣소장 彩色 筆寫本 1872년)중 청라면의 蟻坪과 伏兵里 설명에 高麗 金 將軍 成雨에 대한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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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환여승람 등에도 김성우 장군의 행적이 상세하게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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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浩根의 『四可集에 다음의 글이 있다.

"金成雨 將軍 / -中略- 얼마 후에 朝鮮 太祖는 革命을 일으켰다.

평소부터 公의 용맹을 꺼려하여 여러 번 부르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公은 어쩔 수 없이 말을 타고 칼을 차고 떠나서 스무재(甘峙)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집에서 두어 마장 거리에 있는 곳이다.

공은 비장한 마음으로 말에서 내려서 말에게 이르기를 “나와 네가 이제 어디로 간단 말이냐?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구나!”하였더니 말도 눈물을 흘리며 땅을 발로 후비적거렸다.

공은 마침내 칼을 뽑아 말을 베고 공도 자결하였다. 말은 그 길옆에 묻고 공은 살던 곳인 감암 뒷산에 안장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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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保寧郡誌(보령시 출간)의 인물편 ‘충의’편에 김성우 장군을 맨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본관은 광산이고 고려 때의 시중 김주정의 증손이며 판도판서 김윤장의 아들이다. 고려 말 전라우도 도만호 초토사에 임명되어 당시 서해안에 자주 침범해오는 왜구를 무찌르는데 앞장섰다. 당시 왜구들은 우왕6년(1380)부터 공양왕 2년(1390)에 이르기까지 남포에 그들의 교두보를 세운 듯 여기를 기점으로 충청도 내륙지방까지 침입하여 약탈과 살인 방화를 일삼으며 횡행할 때 남포일대에는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초토사 김성우는 왜구들의 침범 근거지인 남포 일원의 왜구를 소탕하기 위하여 먼저 지금의 대천시 군입리 상륙 상주막에서 첫 번째로 저항해오는 왜구를 무찌르고 다시 흑포 남쪽 갓바위에서 다시 왜구를 무찌르고는 전의를 상실한 왜구를 남포에서 소탕하여 그 침범의 맥을 끊음으로서 다시는 침범의 기회를 잃게 하였다. 그리고는 내륙지방에서 준동하는 왜구를 소탕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는 길을 택해준 장군이다.

그 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서 태조 이성계가 그에게 출사를 권고하여 불렀으나 불사이군의 신조에서 참여를 거부하고 먼저 애마를 죽이고 스스로도 자결하였다.

그 후 그의 묘는 청라면 라원리 발산에 두었는데 조선 선조 때 일어난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장군의 묘를 굴참하고 철장으로 쑤시는 등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김성우 장군은 전설속의 인물이 아닌 고려 말에 실존했던 고려의 장군으로 왜구의 침탈로부터 보령 땅과 보령사람들을 지켜낸 보령의 수호신이자 위대한 장군이었음이 여러 문헌의 고증을 통하여 확실하게 입증되었다. / 성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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