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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공과 왕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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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0-09-05 13:48 조회1,6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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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대(王子臺) 고찰(考察)

1. 王子臺를 ‘神武王 留陳之處’라 한 緣由

新羅 제 45代 神武王 / ~ 839)
姓은 金이요 諱는 祐徵으로 祖父는 惠康大王으로 追封된 元聖王의 아들 禮英이며, 아버지는 成德大王으로 封해진 均貞이고, 어머니는 憲穆太后로 封해진 貞橋夫人 朴氏이며, 妃는 眞從夫人 김씨로 金明海의 女이다.(崇惠殿誌)

神武王의 在位 期間은 3個月 餘 밖에 되지 않았다.
서기 836년 12월 제42代 興德王이 逝去하매 王位를 이을 後嗣가 없었음으로 前王의 堂弟(4寸)로 가장 近親이며 王室의 首長이요, 당시 上大等(宰臣)인 金均貞이 王位를 繼承하는 것이 順理였다.

그러함에도 당시 侍中인 金明은 阿飡 利弘, 裵萱伯 등과 더불어 均貞의 조카요 前王의 堂姪(5寸)이며, 자신의 妹兄인 悌隆을 받들려 함으로 분쟁이 일어 均貞의 아들 祐徵은 從 妹弟 禮徵 및 金陽과 더불어 그 아버지를 받들고 먼저 대궐(積板宮)로 들어가 守備하였으나 勢 不利하여 金 陽은 裵萱伯이 쏜 화살에 맞고, 均貞은 被殺되었음으로 敗하여 後日을 期約하게 되었다.
(東國通鑑 卷11,興德王 11年 條)

이에 悌隆이 제 43대 僖康王으로 卽位하였으나, 겨우 1年이 지난 838년 正月 上大等이던 金 明이 侍中 利弘 등과 더불어 叛亂을 일으켜 王의 近臣들을 모두 죽이니 王도 모면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으므로 金明이 제 44대 王이 되니 閔哀王이다.

한편 金祐徵은 아버지가 被殺되었음으로 怨恨있는 말을 하다가 金明, 利弘 등이 이를 不平하므로 禍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837년 5월 남은 軍士와 妻子를 데리고 黃山津(*梁山의 黃山江 下流 나루: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2, 梁山郡 山川 條 參照)으로 피한 다음 배를 타고 淸海鎭(莞島) 大使 弓福(張保皐)에게로 가서 의지하여 원수 갚기를 꾀하였다.(東國通鑑 卷11, 僖康王 2年 條)

6월에는 阿飡 禮徵과 阿飡 良順도 도망하여 金祐徵에게로 왔다. (東國通鑑 卷11, 僖康王 2年 條)

838년 2월에는 金 陽이 兵士를 募集하여 청해진으로 들어가 祐徵을 만나 擧事할 것을 圖謀하였다.
(三國史記 卷10, 閔哀王 元年 條 및 卷4, 金陽 傳)

祐徵은 淸海鎭(莞島)에 있으면서 金 明이 簒位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청해진 大使 張保皐에게 말하기를 ‘金明은 王을 弑害하여 自立하고, 利弘은 억울하게 君父를 죽였으니 그와 함께 하늘을 볼 수 없다. 원컨대 將軍의 軍士를 의지하여 君父의 원수를 갚겠다’ 하자 張保皐가 말하기를 ‘古人의 말에 義를 보고 勇猛을 아니 쓰지 못한다 하였으니 내 비록 庸劣 하나 오직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하고 곧 군사 5千名을 나누어서 그의 벗 鄭年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면 能히 禍亂을 平定하지 못한다’ 하고 軍士를 일으켰다.(三國史記 閔哀王 條)

(838년) 3월에 金陽이 軍士 5천으로 武州를 襲擊하여 城 밑에 이르니 武州 사람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東國通鑑 卷11, 僖康王 3年 條)

그런 다음 南原으로 나아가 金 明이 보내온 軍士를 만나서 크게 이겼는데 金祐徵은 軍士가 싸움에 오래 지쳤으므로 청해진으로 돌아가 쉬게 하였다.
(東國通鑑 권11, 僖康王 3年 條, 三國史記 卷44, 金陽 傳)

12월에 金陽의 軍號를 “平東將軍”이라 하고 다시 軍士를 출동시키니 金亮詢이 무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來應하였으며, 金祐徵이 또 날쌔고 용맹스러운 閻長, 張弁, 鄭年, 輅金, 張建榮, 李順行 등 6인을 軍兵을 統率하는 將軍으로 삼아 보내니 군사의 威容이 매우 盛하엿다.
북을 치며 行軍하여 武州 鐵冶縣(南平)에 이르니 王(金明)이 大監 金敏周로 하여금 軍士를 거느리고 나아가 싸우게 하였으나 輅金과 李順行이 騎兵 3千으로 敵陣에 突進하여 거의 다 殲滅시켰다.(東國通鑑 僖康王 3年 條)

839年 正月 19일에 晝夜로 兼行하여 達伐丘(大邱)에 이르니 王은 亂軍이 온다는 말을 듣고 伊飡 大昕과 大阿飡 允璘, 의勛 등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게 하였으나 金陽의 軍士가 한번 싸워 크게 이기고 쳐들어오니, 王軍의 죽은 자는 半數가 넘었다.

이에 進擊하여 23일에 慶州에 入城하니 이때의 王은 西郊의 큰 나무 밑에 있었는데 左 右가 모두 흩어짐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月遊宅으로 피하여 들어갔으나 軍士들이 追擊하여 그를 잡아내어 죽엿다. 그러나 여러 臣下들이 禮로써 葬事지내고 諡號를 閔哀라 하였다.(三國史記 閔哀王 條, 新羅敏哀大王 石塔記)

839年 4月에 金禮徵 등이 먼저 이르러 宮中을 깨끗이 하고 禮를 갖추어 맞이하니 祐徵이 들어와서 卽位하였다.
이에 아들 慶膺을 세워 太子로 삼았으며 淸海鎭 大使 張保皐를 封하여 感義軍使로 삼고 食邑 2千戶를 實封하였다.
(東國通鑑 권11, 神武王 條,)

2. 諸 文獻에 있는 王子臺 및 平章洞 記錄

大東地志의 光州 山水 條
平章洞 : 「西北 三十里 神武王後孫 居于此 世爲平章 故名」
평장동은 '광주의 서북 삼십리에 있으며, 신무왕 후손이 이곳에 살았는데 대대로 평장사가 됨으로 인하여 얻은 이름이다.'
王子臺 : 「西南 四十五里 新羅王子留陳之所 有築城臺址
○按 新羅神武王 微時避禍往依 淸海鎭大使張保皐 與武州都督金陽
合謀起兵 誅亂反正 此卽 神武王留陳之處」
왕자대는 '광주의 서남 45리에 있으며, 신라왕자가 진중에 머물던 곳으로 성대를 쌓았던 터가 있다.
○살피건대, 신라의 신무왕이 미력한 때 화를 피하여 청해진대사 장보고 에게로 가서 의탁하고 무주도독 김양 과 더불어 함께 기병을 모의하여 환란을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誅亂反正)하니 여기가 곧 신무왕이 진중에 머물던 곳이다.'

實學者 成海應의
硏經齋全集 羅麗遺民 傳
平章洞 :「新羅王子金興光 知國將亡 遁于光州爲民 子孫因籍焉 仕麗朝 八世相傳爲平章事 洞號平章」
평장동은 ‘신라왕자 김흥광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광주로 피하여 백성이 되니 자손이 이로 인하여 관적으로 삼았다. 고려조에 벼슬하여 8세를 상전하여 평장사가 되니 동호를 평장동이라 하였다’

硏經齋全集 地理類 東水經
王子臺 : 「--由極樂之坪 爲極樂江 至王子臺 砥石江自東來會 由王子臺以上大川二 長城白岩山之 黃龍川 長城蘆嶺之可川入漆川」
‘--극락평에서 극락강이 되어 왕자대에 이르러 지석강이 동쪽으로부터 와서 만난다. 왕자대에서 상류쪽으로 대천이 둘이니 장성 백암산의 황룡천과 장성 노령의 가천이 칠천으로 들어 온다’

* 與地圖書와 湖南邑誌 기록
南平川 :「在州西四十五里 自和順綾州發源 歷南平 至王子臺下
與極樂合」<與地圖書>

南平川 :「在州西四十五里 自和順綾州發源 歷於南平 至王子臺下 合極樂」<湖南邑誌>
남평천은 '광주의 서쪽 45리에 있으며, 화순과 능주에서 발원하여 남평을 지나 왕자대 아래에 이르러 극락강과 합류한다.' 라고 하여 왕자대의 위치를 영산강(극락강)과 남평천(지석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위쪽 大江 上에 있다 하였다.

與地圖書 光州牧 '古跡' 條
王子臺 :「在州西四十五里 大江上 俗傳 三國時王子留陳地所
尙有 築城基址」
왕자대는 '광주의 서쪽 45리 대강 위에 있으며, 세전(世傳)하길 삼국 때 왕자가 유진하던 곳으로 전하며, 아직도 축성하였던 기지가 있다.'

平章洞 : 「新羅王子金興光 來居于此 子孫有九代平章 仍以爲號」
평장동은 '신라왕자 김흥광이 이곳에 와서 살았는데, 자손에서 9대에 평장사를 배출하니 이로 인해 동호가 되었다.'

* 大東地志의 甄萱臺와 王祖臺 記錄.
甄萱臺 : 「北十五里 甄萱較兵之地」
견훤대는 '광주의 북쪽 15리에 있으며 甄萱이 군사를 겨루던 곳이다.' 하여 견훤의 군대가 전투력을 배양하기 위한 훈련장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였다.

王祖臺 : 「西三十里 高麗太祖 留陳之所」
왕조대는 '광주의 서쪽 삼십리로 고려태조가 진중에 머물던 곳이다.' 하였으니 태봉왕 궁예가 서기903年 3月에 王建을 보내어 錦城(羅州) 等 10餘 郡 縣을 攻取하였을 때 王建의 陣所로 推考됨.

湖南邑誌 光州 '古跡' 條의 王子臺와 平章洞 記錄
王子臺 :「在 州西四十里 三國時 王子留陳之所 尙有築城臺址」
왕자대는 '광주의 서쪽 40리에 있으며, 삼국 때 왕자가 진중에 머물던 곳으로 아직도 성대를 쌓아둔 터가 있다.'

平章洞 :「新羅王子金興光 知國將亂出爲庶人 卜居于此 子孫有八代平章事 因以爲號 有遺墟碑金鎭商撰陰記」
평장동은 '신라왕자 김흥광이 장차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을 예지하고 나와서 서인이 되어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자손에서 8대에 평장사를 배출하니 이로 인해 동호를 삼았으며, 유허지에 비가 있으니 김진상이 음기를 지었다.'
* 王祖臺· 甄萱臺 등도 기록되어 있는데 大東地志와 같다.

光州邑誌의 記錄
王子臺 :「在 州西四十里 三國時 王子 留陳之所 尙有築城基址」
왕자대는 '광주의 서쪽 사십리에 있으며, 삼국 때 왕자가 진중에 머물던 곳으로 아직도 성대를 쌓았던 터가 있다.'

平章洞 :「新羅王子金興光 知國將亂出爲庶人 卜居于此 子孫有 八代平章事因以爲號洞 有安心寺 引月庵 棗溪亭 觀德亭 講禮軒 冠帶亭 今皆廢遺趾尙在」
평장동은 '신라왕자 김흥광이 장차 난리가 있을 것을 예지하고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다. 자손에서 팔대에 평장사를 배출하니 이로 인해서 얻은 동호이다. 안심사 인월암 조계정 관덕정 강례헌 관대정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허가 되어 그 유지만 남아있다.'
* 왕조대· 견훤대 기록도 있다.

增補文獻備考의 記錄
王子臺 :「在西四十五里 俗傳 三國時 王子留陳地所」
(增補文獻備考 卷22, 與地考, 山川條, 光州 項)
‘왕자대는 광주의 서쪽 45리에 있으며, 世傳하는바 삼국 때 왕자가 진중에 머물던 곳이다’
* 왕조대· 견훤대 기록은 없으나 왕자대 기록만 있다.

3. (後)三國時 王子臺에 留陣했던 王子

王子臺에 關한 기록은 여러 文獻에 平章洞과 함께 收錄되어 있는데 大東地志에 ‘新羅의 神武王이 微力한 때 禍를 避하여 淸海鎭 大使 張保皐에게로 가서 依託하고 武州都督 金陽 과 더불어 함께 起兵을 謀議하여 患亂을 다스리고 天下를 평정(誅亂反正)하니 여기가 곧 神武王이 陣中에 머물던 곳이다’ 라 하였다.

이 遺址는 新羅 때 神武王이 淸海鎭(莞島)의 張保皐 도움으로 서기 838년 12월에 金敏周의 王軍를 격파한 鐵也縣(南平)과 가까운 곳으로 金祐徵은 여기에 留陳하여 838년 12월부터 閏달을 포함하여 다음 해 4月에 卽位하기 까지 여기에 5개월 以上을 留陣했다가 慶州로 떠날 때 그의 3子 金興光을 淸海鎭에 남겨두게 되니 그 '留陣之處'(뒤에 王子臺로 改稱된 곳)의 관리는 王子公이 맡게 되었을 것이고, 서기 841년 張保皐가 피살된(續日本後記 11, 仁明天皇 承和 9年 正月 條) 後 王子公이 청해진에서 이곳으로 임시 옮겨 있으면서 광주 西一洞(平章洞)에 터를 잡을 때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神武王의 留陣之處'는 후에 新羅 王室로 부터 金興光에게 賜給되었던 곳으로 이로부터 50餘年이 지난 서기 889년~892년을 前後하여 甄萱이 武州를 襲取하여 新羅를 배반하고 後百濟를 自稱하게 되니 王子公은 新羅王室의 王子의 身分으로써 新羅를 背信한 叛賊 견훤과는 근본적으로 妥協이 될 수 없는 처지였기에 부득이 西一洞을 떠나 다시 이곳(神武王의 留陣之處)으로 移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三國史記 眞聖王 6年 條/ 三國史記 甄萱 傳/ 三國遺事 紀異 卷2)

서기 935년 3월 神劒이 父王인 甄萱을 幽閉하고 自立하였으며,
同年 11월 12일 新羅 敬順王이 開京(開城)으로 올라와 歸附하였고, 이듬해인 936년 2월 甄萱의 사위 朴英規가 內附하기를 請하였으며, 同年 6월에 甄萱이 來投하였다.

이에 高麗軍은 서기 936년 9월에 三軍이 일제히 進軍하니 神劒은 그의 아우 靑州(晉州)城主 良劒과 光州城主 龍劒 및 文武의 官僚와 함께 항복하였다.
(三國史記 卷50, 甄萱 傳/ 高麗史 卷2, 太祖 19年 條)

서기 825년경 生인 王子公 金興光 과 855년경 生인 그의 子 角干公 金軾, (高麗)開國功臣인 885년경 生인 孫子 司空公 金吉 및 915년경 生인 曾孫 僕射公 金峻 까지, 4代는 王子臺에 世居하였으므로 王子公의 孫子 金吉은 高麗 使臣으로 서기 934년 8월에 後唐에 갔었음이 中國史書 <冊府元龜>에 있으며, 開國功臣이요 三韓壁上功臣으로 三重大匡, 司空을 除授받았다.
(冊府元龜 卷972, 外臣部17, 朝貢 5/ 吳元卿墓誌銘/
增補文獻備考 卷47, 帝系考/ 高麗史 等)
王子公의 6世孫 平章事 金廷俊의 女(李資謙 母)는 通義國大夫人으로 封爵되었는바 爵號 通義는 羅州의 古號이다.
(高麗史 列傳 李資謙 傳/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5, 羅州牧)

위 事實로 미루어 보아 王子公 金興光과 그 子孫들은 羅州 王子臺에 世居했음을 알 수 있다.

*高麗史에 依하면 王子臺가 있는 地域을 포함하여 羅州地域은 後三國時에 王建을 媒介로 하여 後高句麗인 泰封에 歸附했으니 여기에서 羅州地域이라 함은 羅州, 靈巖, 靈光, 咸平, 務安, 珍島, 莞島, 海南, 康津, 長興 등 全南의 西南海岸 地域과 全北의 高敞地域을 包含한다.

王子臺는 後三國(新羅, 後百濟, 高麗)때 王子公(金興光)이 留陣하였던 遺址였으므로 後世 文獻에<三國時 王子留陳地所>로 기록하고 있다.

4. 王子臺가 있는 학산리 龍山마을 沿革

이 지역은 본래 百濟의 古麻山縣이 었는데,
후에 伏龍縣이라 하였으며(高麗史에는 盃龍縣이라 함)
新羅가 백제를 멸하고 龍山으로 고쳤다.

757년(景德王 16)에 武州(光州)의 領縣이 되었으며,
高麗 初인 940년(太祖 23) 伏龍縣으로 改稱하고,
1018년(顯宗 9) 羅州의 屬縣으로 倂合되었다.
(三國史記/高麗史 卷57, 地理志/世宗實錄 卷151, 地理志/新增東國輿地勝覽 卷35, 羅州牧/大東地志 卷12, 羅州 古邑 條)

학산리는 복암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廢合에 따라
용산리, 봉호리, 계림리, 용당 일부와 서부면의 동산리 일부,
또 광주군 마곡면의 용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鶴林과 龍山의 이름을 따서 학산리라 하였고, 老安面에 편입되었다.

龍山마을 앞에 있는 海拔 52M 山은

王子臺(왕자대: 왕자가 거처하던 곳)
王子峯(왕자봉: 왕자가 거처하던 뫼),
馳馬峯(치마봉: 말 달리던 뫼=말 조련장),
태뫼산(테뫼식 山城: 山 정상 부근에 머리띠를 두른 듯이 쌓은 城이 있는 山).
-山城은 構造에 따라 包谷式, 테뫼式, 複合式으로 分類한다-
등으로 呼稱되고 있다.



왕자대(王子臺) 위치

正祖 때 실학자 成海應 硏經齋全集 地理類 東水經에
沙湖江에 대한 아래의 설명이 있다.
‘沙湖江源出潭陽之秋月山。山壁削立。四圍如城。徒行者只得緣西北而上。其中有泉十三。而溪澗?紆。東爲二石潭。潭下有巨巖。水由巖穴而瀉下。飛湍?空。注爲大澤。是爲龍淵。諺傳岩穴龍所穿也。屈曲之迹猶在。南流爲原栗川。至府東。北折而西南流。爲竹綠川。又西南爲滄江。至昌平縣。爲?川爲碧津。由極樂之坪。爲極樂江。至王子臺。砥石江自東來會。

由王子臺以上大川二。長城白岩山之黃龍川。長城蘆嶺之可川入?川。小川五。潭陽滅峙之薪川。玉果之大橋川入竹綠川。光州無等山之三支川入?川。無等山之巾川。長城三聖山之九登川入碧川。

砥石江源出綾州之呂岾。西北流爲車衣川。環綾州州治。西北流經南平縣。爲城灘砥江。西北至王子臺。入沙湖江。

由王子臺以上大川二。光州無等山道川。入于綾州治前。南平德龍山之魚川。入于王子臺之下。

二江旣合。環羅州▣治。爲廣灘。折而西至??巖。爲錦津爲滎江。西爲?浦。至古幕院。爲沙湖津。西南爲曲江梨山夢灘駐龍之浦。經奄山爲木浦。西入于海。木浦者高麗莊和后吳氏浣紗而五色雲所見處。至今有浣絲泉。
大川來會者二。靈光高城山之鵲川入沙湖江。靈岩月出山之德津浦入駐龍浦。’


< 務安 山川條 >
ㅇ 沙湖江
: 東20里 羅州榮山江下流 自此入海有梨山津夢灘津 其入海處 曰木浦

출전: 硏經齋全集外集 44권

大東地志
平章洞 : 「西北 三十里 神武王後孫 居于此 世爲平章 故名」
평장동은 '광주의 서북 삼십리에 있으며, 신무왕 후손이 이곳에 살았는데 대대로 평장사가 됨으로 인하여 얻은 이름이다.'라고 하여 평장동을 아예 신무왕 후손의 세거지로 규정하고 있다.

王子臺 : 「西南 四十五里 新羅王子留陳之所 有築城臺址
○按 新羅神武王 微時避禍往依 淸海鎭大使張保皐 與武州 都督金陽 合謀起兵 誅亂反正 此卽 神武王留陳之處」
-왕자대는 '광주의 서남 사십오리에 있으며, 신라왕자가 진중에 머물던 곳으로 성대를 쌓았던 터가 있다. ○살피건대, 신라의 신무왕이 미력한 때 화를 피하여 청해진대사 장보고에게로 가서 의탁하고 무주도독 김양과 더불어 함께 기병을 모의하여 환란을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誅亂反正)하니 여기가 곧 신무왕이 진중에 머물던 곳이다.' 라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 대동여지도를 보면 왕자대가 있는 곳은 古邑城이 있던곳이라고 표시되어 있으며 漕運의 舟橋(배다리)지역이었다.-

光州邑誌
王子臺 :「在 州西四十里 三國時 王子留陳之所 尙有築城臺址」
왕자대는 '광주의 서쪽 40리에 있으며, 삼국 때 왕자가 진중에 머물던 곳으로 아직도 성대를 쌓아둔 터가 있다.'

平章洞 : 「在 州北四十里 新羅王子金興光 知國將亂出爲庶人 卜居于此 子孫有八代平章事 因以爲號 有遺墟碑金鎭商撰陰記」평장동은 '광주의 북쪽 40리에 있으며, 신라왕자 김흥광이 장차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을 예지하고 나와서 서인이 되어 이곳에 터를 잡고 사셨는데 자손에서 8대에 평장사를 배출하니 이로 인해 동호를 삼았으며, 유허지에 비가 있으니 김진상이 음기를 지었다.'

湖南邑誌
王子臺 :「在 州西四十里 三國時 王子 留陳之所 尙有築城基址」
왕자대는 '광주의 서쪽 사십리에 있으며, 삼국 때 왕자가 진중에 머물던 곳으로 아직도 성대를 쌓았던 터가 있다.’

平章洞 :"在 州北四十里 新羅王子金興光 知國將亂出爲庶人 卜居于此 子孫有 八代平章事因以爲號洞 有安心寺 引月庵 棗溪亭 觀德亭 講禮軒 冠帶亭 今皆廢遺趾尙在"
-평장동은 광주의 북쪽 40리에 있으며, 신라왕자 김흥광이 장차 난리가 있을 것을 예지하고 이곳에 터를 잡고 사셨다. 자손에서 팔대에 평장사를 배출하니 이로 인해서 얻은 동호이다. 안심사 인월암 조계정 관덕정 강례헌 관대정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허가 되어 그 유지만 남아있다.-

與地圖書
王子臺 :「在州西四十五里 大江上 俗傳 三國時王子留陳地所 尙有 築城基址」
왕자대는 '광주의 서쪽 45리 대강 위에 있으며, 속설에 삼국(*후삼국) 때 왕자가 유진하던 곳으로 전하며, 아직도 축성하였던 기지가 있다.'


輿地圖書와 湖南邑誌의 光州牧 '山川'

南平川 :「在州西四十五里 自和順綾州發源 歷南平 至王子臺下 與極樂合」<여지도서>
南平川 : 「在州西四十五里 自和順綾州發源 歷於南平 至王子臺下 合極樂」<호남읍지>
남평천은 '광주의 서쪽 45리에 있으며, 화순과 능주에서 발원하여 남평을 지나 왕자대 밑에 이르러 극락강과 합류한다.'라고 하여 왕자대의 위치를 영산강(극락강 또는 칠천이라고도 함)과 남평천(지석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위쪽 大江 上에 있음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增補文獻備考
王子臺 :「在西四十五里 俗傳 三國時 王子留陳地所」(『增補文獻備考』卷22, 與地考, 山川條, 光州 項)
'왕자대는 광주의 서쪽 45리에 있으며, 속설에 삼국 때 왕자가 진중에 머물던 곳이라 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大東地志
< 羅州 山川條 >
ㅇ 沙明江
:南平之砥石江 光州之黃龍川合于王子臺下 西流至州東5里爲廣灘 折而西南流至?鵲岩 爲錦江津爲榮山江爲南浦 西流左過松只川爲曲浦 至古幕院右過鵲川爲沙湖津入務安界 (
-남평의 지석강과 광주의 황룡천이 왕자대 아래에서 합하여 서쪽으로 흘러 나주의 동쪽 5리에서 광탄이 되고 서남쪽으로 흘러 노작암에 이르러 금강이 된다. 다시 영산강 남포가 되어 서쪽으로 흘러 왼쪽에서 송지천을 지나 곡포가 되어 고막원을 지나고 오른쪽의 작천을 지나 사호진(사호강)이 되어 무안 경계로 들어 간다.-
< 南平縣 >
ㅇ 砥石江: 源出綾州之呂岾 西北流爲車衣川 環綾州治 東北流右過和順至道川 西流左楮浦川 西北流至縣東7里爲砥石江 縣北3里爲城灘 西流之王子臺左過魚川至羅州界 爲榮山江上流
-능주의 여점에서 발원하여 서북류하여 차의천이 되고 능주 소재지를 돌아 동북류하다가 오른쪽에서 나오는 화순의 도천을 합하고 서쪽으로 흘러 왼쪽에서 나오는 저포천을 합하여 서북쪽으로 흘러 남평현의 동쪽 7리에서 지석강이 된다. 다시 남평현의 북쪽 3리에서 성탄이 되어 서류하다 왕자대 왼쪽에서 어천을 합류하여 나주 영산강 상류가 된다.-

광주시청 홈페이지 광산구 향토항목의 전설 편에
용봉동(龍峯洞)과 왕자대(王子臺) 소개가 있다.

향토문화진흥원장 김경수 의 “광주땅이야기”

광주 땅에 ‘왕’자가 들어있는 곳이 있다. 용봉동에 전하는 ‘왕개’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 그 실마리를 풀어보기 위해 관련 증거를 더듬어 본다. 광주 서편 영산강 수로와 들판이 내려 보이는 둔덕산에는 후삼국 때 쟁패 흔적을 알려 주는 땅이름이 남아 있다. 그 중 고산자가 기록한 왕조대(王祖坮)와 왕자대(王子坮)가 관심거리다. 두 지명은 《대동여지도》에 선명하게 표기되어 있으며, 1864년 간행된 것으로 여겨지는 『대동지지』에도 설명이 나와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왕조대는 광주 서쪽30리에 있으며, 후백제 왕과 싸우던 고려 태조 왕건의 진터다.
『읍지』를 살피면 남평천은 광주 서쪽 45리에 있는데, 왕자대 아래서 극락강과 합류한다.

丁潤國은 1989년 펴낸 『나주목지』에서 王子臺 터를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봉호마을 뒤 해발 52m 봉우리로 비정했다.
丁潤國은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동산마을 뒤 해발 37m 복바위를 王子臺 터로 보았다.
광산구 용봉동 용동마을 서편 나주시 용산마을 동각에는 근래 붙인 ‘왕자정’판이 걸려 있다.
왕자대에 관한 『대동지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주 서남쪽 45리 지점에 왕자대란 성터가 있다. 이는 신무왕이 김양과 장보고의 힘을 빌어 반정을 도모한 곳이다.
남평현 동쪽 7리에서 지석강이 되고, 현 북쪽 3리에서는 성탄이 되어서 서쪽으로 흘러가다 왕자대 왼쪽에서 어천을 합하여 나주 경계에 이르러 영산강 상류가 된다.

* 대동지지 남평현 지석강 설명에서 '남평현의 북쪽 3리에서 성탄이 되어 서류하다 왕자대 왼쪽에서 어천을 합류하여 나주 영산강 상류가 된다' 하였다.



* 위 글 에서 장보고가 암살당한 해를 삼국사기와 다르게 서기 841년으로 기록함은
(아래) 일본측 사료에 의하였다.

<續日本後記 >
續日本後記 卷 11 仁明天皇 承和9年 春 正月(842년 陰1月 10日)

新羅人 李少貞 등이 筑紫大津에 도착하여 張寶高의 죽음과 廻易使의 물건을 요청함

(承和 9년, 842, 봄 정월 丙寅 초하루) 乙巳 신라인 李少貞 등 40명이 筑紫大津에 도착하였다.
大宰府에서 사자를 보내어 온 까닭을 물으니, 우두머리인 少貞이 “張寶高가 죽고[註 001]

그의 副將 李昌珍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자 함에, 武珍州[註 002] 列賀[註 003] 閻丈[註 004]이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여 평정하였으므로 지금은 이미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다만 賊의 무리들이 網을 빠져나가 문득 당신들 나라에 도착하여 백성들을 소란스럽게 할까
두렵습니다. 만약 그쪽에 도착한 배 중에서 공식문서를 가지지 않은 자가 있으면,
청컨대 있는 곳에 간절히 명하여 심문하여 붙잡아 들이십시오.

또 지난 해 廻易使 李忠, 揚圓 등이 가지고 온 물건들은 곧 부하 관리와 죽은 張寶高 자손들에게
남겨진 것이니 바라건대 빨리 보내주십시오.
그런 까닭에 閻丈이 筑前國에 올리는 牒狀을 가지고 찾아 뵈러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公卿이 의논하기를 “少貞은 일찍이 장보고의 신하였는데 지금은 閻丈의 사신이다.
저 신라인은 그 마음가짐이 不遜하고 진술하는 바의 상황이 피차 일정치 않으니,
상인이 거짓으로 교통하고자 하여 교묘한 말로 修交를 일컫는 것임을 확실히 알겠다.
지금 다시 牒狀을 풀이 해 보면 ‘李少貞은 閻丈이 筑前國에 올리는 첩장을 가지고 찾아뵈러 왔다’고 말하나,
그 牒狀에는 宰府에 올린다는 말이 없으니, 前例에 합당하다고 이를 만한 것이 없다.
그 첩장을 조속히 進上하는 것이 마땅하나, 牒旨가 무도한 것 같으므로 少貞에게 부쳐
돌려보내야 한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少貞은 지금 이미 閻丈에게 의탁해 있으면서 장차 먼저 왔던 李忠, 揚圓 등을
붙잡으려고 ‘지난 해 廻易使 李忠 등이 가지고 온 물건은 곧 죽은 장보고 자손에게 남겨진 것이므로
속히 보내주기를 청한다’고 하는데, 지금 들은 바대로 하여 李忠 등으로 하여금 少貞 등과 함께
가라고 하면 그것은 길을 잃고 헤매는 짐승을 굶주린 호랑이에게 던져주는 것이다.
모름지기 李忠 등에게 물어 보아, 만약 少貞 등과 함께 돌아가기를 싫어하면 그가 바라는 대로
따르되 늦고 빠른 것은 명에 맡기자”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李忠 등은 廻易의 일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그 나라에서 亂離를 만나 무사히 도착할 수가 없어 다시 筑前大津에
온 것이다. 그후 於呂系 등이 귀화하여 와서 ‘우리들은 장보고가 다스리던 섬[註 005]의
백성입니다. 장보고가 작년(841) 11월 중에 죽었으므로 평안하게 살 수 없는 까닭에
당신 나라에 온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날 前 筑前國守 文室朝臣宮田麻呂가 李忠 등이 가지고 온 여러 가지 물건들을 빼앗았다.
그가 말하기를 ‘장보고가 살아있을 때 당나라 물건을 사기 위하여 비단을 주고 그 댓가로
물건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 수는 적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지금 장보고가 죽어 물건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장보고의 사신이 가지고 온 물건을 빼앗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설령 나라 밖의 사람이 우리의 토산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 땅에 到來한다 할지라도,
모름지기 그 마음을 흔쾌히 여겨 그들이 갖고자 하는 바를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廻易使 편에 가지고 온 물건을 빼앗고 장사하는 권리를 끊었다. 이는 府司에서
조사·감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대로 겸병하게 된 것이다. 상인의 재화를 잃게함이 없으면
군주의 憲章에 제약함이 없음을 깊이 드러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府의 관리에게 명하여
빼앗은 여러 가지 물건을 자세히 조사·기록하여 한편으로는 되돌려 주고 또 이유를 잘 말하고,
아울러 양식을 지급하여 본국으로 돌려 보냈다.

[註 001] 張寶高가 죽고 : 장보고의 사망시기에 대하여 『三國史記』 권 11에서는
846년(문성왕 8) 봄에 암살되었다고 하였으나,
『續日本後紀』에서는 841년 11월 중에 죽었다고 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편 圓仁이 쓴 『入唐求法巡禮行記』 권 4, 會昌 6년 7월 9일조에, 장보고의 遣唐買物使로
활약하던 前淸海鎭兵馬使 崔暈이 국난을 만나 楚州 漣水縣 신라방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점으로 보아 장보고의 피살 시기는
『續日本後紀』에서와 같이 841년 11월 중이 아니었을까 한다.

[註 002] 武珍州 : 지금의 광주직할시에 治所를 두고 있던 신라 9州 중의 하나이다.
경덕왕 16년에 武州로 개명되었는데, 본서에서 842년 현재 武珍州라 한 점에서
혹시 武珍州의 이름이 경덕왕대 이후에 복고된 것이 아닌가 한다.

[註 003] 列賀 : 別駕의 誤記로 보인다. 別駕는 州의 차관직인 州助의 다른 이름으로,
奈麻에서 重阿?까지의 관등 소지자가 임명되었다.

[註 004] 閻丈 : 閻長으로도 표기한다. 武州사람으로 金祐徵의 옹립거사에서 驍將으로서
참여하여 그 포상으로 武州別駕가 되었다. 장보고가 난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閻長에게 장보고를 암살케 하였다. 염장은 장보고를 제거한 후 조정으로부터
阿?의 관등을 받았다.

[註 005] 장보고가 다스리던 섬 : 지금의 전라남도 莞島로, 그곳에 청해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중심 거점은 將島였는데 현재 문화재연구소에서 4차에 걸쳐 발굴·조사하고 있다. / 성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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