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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족보의 유래 |
족보란 한 존속의 계통과 혈통에 관계되는 것을 기록한 책’을 말한다.
족보(族譜)는 일찍이 중국(中國)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소위 [제계(帝系)]라 하여 왕실(王室)의 계통(系統)을 쓰기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곧 제왕년표(帝王年表)이다. 개인에 대한 족보(族譜)는 한(漢)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현량과(賢良科)」라는 벼슬에 추천되는 방편으로 쓰이게 되었다. 개인의 내력(來歷)과 조상의 열력(閱歷)을 적음으로써 그 가계(家系)를 알 수 있게 하였다.
위(魏)나라 때 더욱 발달되어 「구품중정법(九品中正法)」이 생겨 품수(品數)에 따라 관리(官吏)를 등용하였다. 위진시대(魏晋時代)를 거쳐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학문(學問)으로 보학(譜學)을 연구하게 되었다.
남조(南朝)의 제(齊)나라 사람 가희경(賈希鏡)을 보학(譜學) 연구의 선구자(先驅者)로 꼽는다. 그의 부조(父祖) 삼대(三代)가 모두 보학(譜學)에 밝았다.
그의 조부(祖父) 가필지(賈弼之)는 각성씨(各姓氏)의 족보를 모아 기초를 닦아 놓았으며, 그의 부(父) 가비지(賈匪之)도 이것을 계속 연구하였다. 그러다가 가희경대(賈希鏡代)에 와서 중국(中國) 전토(全土) 사족(士族)의 족보(族譜)를 총망라하여 백질(百秩) 칠백권(七百卷)에 달하는 거서(巨書)를 만들어 냈다. 이것이 사인족보(士人族譜)의 시초로서 가장 정확한 계보(系譜)이다.
당(唐)나라 때 유지기(劉知幾)는 보학(譜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문화위(高門華胃)의 집안에서 세상에 빛나도록 덕(德)을 쌓아 제자(弟子)들이 계계승승(繼繼承承)하여 부조(父祖)의 명예(名譽)를 나타내고 선열(先烈)의 공덕(功德)을 후세(後世)에 끼쳐 주었다.
그러나 선조(先祖)들의 사적(事蹟)에 대하여 사체(史體)보다는 매우 현요(眩耀)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 말은 자기 조상의 공적을 나타내는 것은 좋으나 때로는 사실 이상으로 추존(追尊)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현란(眩亂)케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족보(族譜)에도 이러한 일들이 적지 않다. 조상의 공적을 들추어 대대로 우려먹는 따위의 일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족보(族譜)는 고려(高麗) 때부터 있어 왔다. 역시 왕실(王室)의 계통(系統)을 기록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대체로 고려(高麗) 중엽(中葉) 의종(1147~1170) 이후로서 김관의(金寬毅)의 『왕대실록(王代實錄)』, 임경숙(任景肅)의 『선원록(璿源錄)』이 그 효시(嚆矢)라고 하겠다. 여기에는 왕실(王室)의 친척(親戚)인 종자(宗子)와 종녀(宗女)까지 기입되어 족보(族譜)의 형태를 처음으로 갖추었다. 그러나 아직 세보(世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써 볼 때 족보(族譜)와 성씨(姓氏)와의 관계도 짐작할 수 있다. 신라(新羅) 초에 육성(六姓)이 있었다고 하나 그 근거는 확실하지가 않고 그저 전해 올 뿐이다.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성씨(姓氏)가 없는 사람은 과거(科擧)에 응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성씨(姓氏)가 많이 생겨난 것으로 본다.
고려(高麗)에서는 동족(同族)간에 족보(族譜)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다만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는 부자(父子)관계를 밝혀놓고 있다. 이것이 후대(後代)에 나온 각 씨족(氏族)의 족보(族譜)에 시조(始祖)로 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왕조로 들어와서 상신록(相臣錄), 공신록(功臣錄) 등이 정비되어 그들의 시조(始祖)나 부자(父子)관계를 일부분이나마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족보(族譜)의 체계(體系)를 세운 것은 문화유씨(文化柳氏)의 『가정보(嘉靖譜)』로 볼 수 있다. 이보다 앞서 나온 것이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성화보(成化譜)(1420~1488)』라고 하나 그것은 서문(序文)만이 남아 있고 전하지는 않는다. 문화유씨(文化柳氏)의 『가정보(嘉靖譜)』는 명(明)나라의 가정(嘉靖) 四一년 이조(조선조)의 명종(明宗) 十七년(1562)에 나왔으며, 처음으로 체계적(體系的)인 편찬(編纂)을 하여 외손(外孫)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 이 족보(族譜)는 후일의 여러 족보(族譜)를 만드는 데 좋은 모형이 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족보(族譜)가 나오기 전에는 가첩(家牒)이나 가승(家乘) 등이 있었을 뿐이다.
그 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전화(戰火)로 말미암아 사회(社會)는 혼란했고 문헌(文獻) 역시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숙종(肅宗) 이후에야 많은 족보(族譜)가 쏟아져 나왔다. 족보(族譜)가 없으면 상민(常民)으로 떨어져 군역(軍役)을 맡는 등 사회적(社會的)인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뇌물을 써가면서 족보(族譜)에 한몫 끼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일들이 오래 계속되어 족보(族譜)로 말미암은 통폐(通弊)가 컸을 때도 많았다.
그러나 동족(同族)으로서의 돈독(敦篤)을 도모하는 데는 족보(族譜)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혈통(血統)과 가계(家系)가 똑똑히 기록되어 있어 훌륭한 역사(歷史)의 구실을 하고 있다. 여러 대(代)를 내려오면서 종파(宗派)가 갈리고 일가(一家)를 서로 모르게 될 때에도 그 우의(友誼)를 찾는 길은 족보(族譜)가 가장 빠르다. 더구나 선조(先祖)의 산소(山所)에 시제(時祭)를 지내는 일은 그것을 형식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일족(一族)이 한자리에 모여 조상을 추앙(推仰)하는 미풍양속(美風良俗)이라 하겠다.
우리는 흔히 동성동본(同姓同本)은 백대지친(百代之親)이라 하나, 대다수가 그런 경우겠지마는 그러나 득성(得姓)할 때의 근원을 고증(考證)하지 않고는 동성동본(同姓同本)을 함부로 일률시(一律視)해서는 안 되는 경우도 있다.
한편 우리의 성씨(姓氏)가 중국(中國)의 성씨(姓氏)와 같은 것이 많다. 그렇다고 뚜렷한 전거(典據)도 없이 덮어놓고 중국(中國)의 유명한 사람을 조상으로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중국(中國)의 성씨(姓氏)는 二千五百이상이 되며 벌써 당대(唐代)에 나온 『원화성씨찬(元和姓氏纂』에서 그들 성씨(姓氏)의 유래(由來)를 밝혀 놓고 있다.
우리는 보학(譜學)을 연구대상(硏究對象)으로 할 때 먼저 그 유래(由來)를 밝혀야 한다. 문헌(文獻)에 기입(記入)되어 있지 않은 성씨(姓氏)의 동래설(東來說)은 위험한 일이다. 고려(高麗) 후반기(後半期)의 대성(大姓)들은 거의 역사(歷史)에 기록되어 있다. 왕실(王室)과 인친(姻親)관계이거나 혹은 초기(初期)부터 내려오던 성(姓)들이 우리 성씨(姓氏)의 대성(大姓)이 된다. 씨족수(氏族數)가 적은 성씨(姓氏)일수록 그 유래(由來)를 상고(詳考)할 수 있는 문헌(文獻)들이 적다.
또 족보(族譜)를 편찬(編纂)함에 있어서 조상의 행적(行績)을 객관적(客觀的)으로 보지 않고 주관적(主觀的)으로 그것을 찬양한다면 사기(史記)와는 맞지 않는 모순이 생긴다. 특히 관직명(官職名)과 관직품계(官職品階)에 있어서 시대적(時代的)인 고증(考證)도 없이, 이를테면 고려(高麗)의 관직(官職)이 이조(李朝)의 관직(官職)으로 기록되고 이조(李朝)의 것이 고려(高麗)의 것으로 함부로 기입되기도 한다. 또 품계(品階)도 실직(實職)과는 달리 높여서 기록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러한 것이 통폐(通㢢)의 하나이다. 확실한 역사적(歷史的)인 고증(考證)아래 학자(學者)냐 정치가(政治家)냐 그렇지 않으면 도덕(道德)이 높은 유일(遺逸)이냐 하는 점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흔히 명현(名賢)의 문인(門人)이라 하여 기록하고 있으나 막상 그 문인록(門人錄)에서 찾아보면 나오지 않는 수가 적지 않다. 이러한 것들을 신중히 해서 선조(先祖)에 대한 욕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 자기의 시조(始祖)가 오래지 않다 하여 굳이 신라나 고려까지 올라가서 계대(系代)를 하는 경우도 이따금 보게 된다. 전거(典據)도 없이 짐작으로만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 흔히들 무슨 왕의 후손이라고들 하지마는 매우 의아(疑訝)스러운 점이 많다. 역사가 오래다고 좋다든지 무슨 왕손(王孫)이라 해서 크게 내세울 것은 못된다. 사실 그대로를 적는 데 의의가 있다.
예부터 삼대무현관(三代無顯官)이면 그 집은 문벌(門閥)이 낮아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당대(當代)의 자기 자신이 노력하여 출세하라는 격려의 말이지 높은 벼슬을 지낸 조상을 내세우라는 뜻은 아니다. 진실로 족보의 가치를 높이려면 사실(史實) 하나하나가 고증(考證)과 전거(典據)에서 나온 기록이어야 한다.
숙종(肅宗) 이후 많은 종회(宗會)가 생기어 즉, 화수회(花樹會)로서 종친(宗親)의 돈목(敦睦)을 꾀한다 하였으나 그것이 순수하게 운영되지 못하였고, 때로는 당쟁(黨爭)에 이용되기도 하여 의외(意外)로 많은 폐풍(㢢風)을 낳고 말았다. 그것은 대원군(大院君) 집정시(執政時)에 이르기까지 사회적(社會的)인 문제로 확대되었다.
족보는 일족(一族)의 친목(親睦)을 도모하기 위한 값있는 씨족사(氏族史)로서 그것을 오래도록 보존하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지 언제까지나 지나간 명신현관(名臣顯官)들의 조상만을 내세울 것은 아니다. 높은 벼슬자리가 나오는 것을 경쟁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거기에 의지하거나 그것을 이용하는 따위도 없어진 지 오래이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의미의 보학(譜學)은 연구되어야 한다. 보학은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고 문명이 있는 세계 각국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크게 연구되고 있는 학문이다.
과거의 우리 족보의 결함은 과감하게 시정되어야 한다. 앞으로 만드는 족보(族譜)는 굳이 한자(漢字)만으로 할 필요도 없고, 또 부계중심(父系中心)으로 한다든지 여자(女子)의 이름을 뺀다든지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모계(母系)와 인계(姻系)를 아울러 밝히는 것이 좋다.
또 계대(系代)만을 나열(羅列)하여 따지기만 하는 식보다는 사진(寫眞)도 넣고 년대(年代)도 서기(西紀)로 기입하여 후손(後孫)들이 친근(親近)하게 읽고 보고 할 수 있도록 현대감각(現代感覺)을 살린 합리적(合理的)인 편찬을 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歷史的)인 인물(人物) 뒤에는 반드시 큰 행적(行蹟)이나 사건(事件)이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것은 객관적(客觀的)이면서도 구체적(具體的)으로 기록하여 후세(後世)의 좋은 사료(史料)로 남기는 점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