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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취사당서(1) |
堂奚以聚斯名盖獻文子築室既成而張老頌禱之辭也苟或成室而不聚族則奚取於斯哉慶吊之必於斯笑語之必於斯則堂之名得矣夫族其初一而分爲兄弟兄弟而至於親盡親盡而至於百世之宗此親疎之等也疎者其勢離然而究基本則合于一故聖人敎民不忘本而離者合之堯典之親周禮之睦韋氏之花樹其義一也是以潯陽宗社悟歎其疎易眉山譜亭申戒其忽忘苟使疎易者無至於忽忘而推廣其親親之道則聚斯二字豈必專美於古而止耶平章洞粤我 鼻祖新羅王子公之始基而子孫八世官十二平章以名基地自麗至我朝名碩輩出雲耳蕃昌蔓延八域如木之千枝水之萬派而基本源一平章洞也然則於其聚族也無堂已乎在昔 崇禎後丁巳族大父退漁公諱鎭商氏竪碑於平章洞遺墟記實蹟生庭先考已酉牧羅州時剏設碑直家余於乙酉知光州因各派諸宗慨歎會宗之無所先捐俸金且請助於湖南諸宗營建此堂十間庫舍八間門廊五間往議於尙書永壽甫而名曰聚斯吁其美哉堂未告訖余遞移南原遂勤託於族兄長城宰五鉉甫而本洞有司商洙壽翼殫誠不懈竟圖其成棟宇輪焉而翔垣墉井然而緻幹役則瑢鉉在膺也盖其於肯構斯堂非敢曰樹立而其經始規畫之功不能辭也於是乎安洞永壽甫爲拋樑文樓洞判書從兄壽鉉氏跋明洞參判永穆記而又珠聯以侈之筆花墨雲輝映一代堂亦自此生顔玆豈非吾宗盛事耶盖此平章之洞佛臺嶷然而爲主瑞石嶄然而爲案夜常有明光如火照 諸峰環列如屏障南州淸淑之氣扶輿蜿蟺直馳溱其間平陸盤迴如金甌遂成一大基壯矣哉我祖先鍾毓山川固可驗而子孫之蕃簪組之赫亦未必不由於積蔭根基也古人云以目之視而思從之爲其後而觀此洞升此堂周覽山川之隱隱睠顧桑梓之依依則寧可無愴然思古而有不忘本之心耶凡我諸宗苟能以不忘本之心推而達之於敦睦之道則庶幾無負斯堂之名矣於是乎序
崇禎紀元後五辛卯六月下澣 서기1951년 通訓大夫義城縣令 胤鉉 序
[譯文] 당(堂)은 어찌 취사(聚斯)라 이름하였는가 대개 헌문자(獻文子)가 집을 짓고 낙성(落成)할 때 장로(長老)가 송도(頌禱)한 말이다. 진실로 집이 이루어지고도 종족(宗族)을 모으지 아니하면 무엇을 취하지 아니하겠는가 경조(慶弔)도 반드시 여기서하고 즐거움도 반드시 여기서 한다면 당(堂)의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符合)되리라.
무릇 종족(宗族)은 그 처음은 한 사람이나 이어 형제가 되고 형제로서 친진(親盡:봉제사 하는데 대진이 된다는 뜻)이 되고 친진(親盡)이 백세종(百世宗)이 되나니 이것이 친(親)하고 먼 등분(等分)이다. 먼 것은 사세(事勢)에 어쩔 수 없으나 그 근본을 추구하면 결국 하나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백성을 가르치되 근본을 잊지 아니하고 분리(分離)한 것을 모이게 하나니 요전(堯典)의 친(親)과 주례(周禮)의 화목(和睦)과 위씨(韋氏)의 화수(花樹)가 그 뜻은 하나이다.
이러므로 심양종사(尋陽宗社)에도 그 소이(疎易)함을 탄식하였고 미산보정(眉山譜亭)에도 그 홀홀(忽忽)하게 잊어버리는 것을 경계하였으니 진실로 소이한 이로 하여금 홀연히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여 친친(親親)하는 도(道)를 미루어 넓히면 취사(히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여 친친(親親)하는 도(道)를 미루어 넓히면 취사(聚斯) 두 글자가 어찌 옛적에만 아름다움이 되리요.
평장동은 우리 시조 왕자공(始祖王子公)이 비로소 정한 터전으로서 자손이 팔세(八世)에 십이평장사(十二平章事)가 속출(續出)하니 그 땅 이름을 평장이라 하였고 려조(麗朝)로부터 조선조(朝鮮朝)에 이르러 이름난 벼슬과 큰 선비가 이어서 배출하고 자손이 번창(蕃昌)하여 팔도에 뻗치니 나무가 천 가지로 뻗어가고 물이 만(萬)갈래로 흐르는 것 같으나 그 근원은 오직 평장동이다.
그렇다면 종족이 모일 집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옛적 영조정사(英祖丁巳:1737)에 족대부(族大父) 퇴어공(退漁公) 휘 진상(鎭商)씨가 평장동 유허(平章洞遺墟)에 비석을 세워 실적(實蹟)을 기록하였고 생가선고(生家先考)께서 기유(己酉:1849)년에 나주목사(羅州牧使)로 계실 때에 취사당 당직(堂直)이 집을 마련하였다.
내가 을유(乙酉:1885)년에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부임하여 오니 각파제종(各派諸宗)들이 평장동에 종회소(宗會所)가 없는 것을 한탄하므로 내가 먼저 봉급을 털어낸 다음 호남제종(湖南諸宗)들에게 도움을 청하여 본당십칸(本堂十間)과 고사팔칸(庫舍八間)과 문랑오칸(門廊五間)을 세우기로 예정하고 판서(判書) 영수(永壽)에게 의논하여 집 이름을 취사(聚斯)라 하였으니 아! 참으로 아름답도다.
집이 미처 완공되기 전에 내가 남원(南原)으로 전임하게 되자 족형(族兄) 장성부사(長城府使) 오현(五鉉)씨에게 부탁하였고 본동 유사(本洞 有司) 상수(商洙)와 수익(壽翼)이 정성껏 보살펴 마침내 역사가 이루어지니 집이 드높고 원장이 방정(方正)하도다. 간역(幹役)에는 용현(瑢鉉)과 재응(在膺)이다 대개 이 집을 짓는데 내가 감히 세웠다고는 할 수 없으나 시작하고 계획한 공(功)은 사양하지 않겠다.
이 안동(安東) 영수(永壽)가 상량문(上樑文)을 짓고 누동 판서(樓洞 判書) 종형(從兄) 수현(壽鉉)씨가 발(跋)을 짓고 명동 참판(明洞參判) 영목(永穆)이 기(記)를 짓고 또 주련(珠聯)으로 장식하니 필화(筆花)와 묵운(墨雲)이 일대(一代)에 휘황(輝煌)하게 비치고 집이 또한 빛이 나니 이 어찌 우리 종족(宗族)이 경축할 성사(盛事)가 아니겠는가.
대개 이 평장동은 불대산(佛臺山)이 의연(毅然)히 주산(主山)이 되고 서석산(瑞石山)이 참연히 안산(案山)이 되어 밤에는 항상 밝은 빛이 비치고 봉우리가 병풍(屛風) 같이 둘렀으니 남주(南州)에 청숙(淸淑)한 기운이 얽히고 바로 그 사이에 쏘는 듯 평지가 돌아들어 금사발과 같아 드디어 큰 터전이 되었으니 엄숙하고 장(壯)하도다.
우리 선조의 쌓은 덕은 산천을 보아도 가히 증험하여 알 수 있으리라. 자손이 번창하고 벼슬이 혁혁(爀爀)하니 선조의 쌓으신 음덕의 기반이로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눈으로 보면 생각이 따른다 하였으니” 후손이 되고서 이 마을을 보고 이 집에 올라 산천의 은은(隱隱)한 것을 둘러보며 고향 전원(田園)의 의의(依依)한 모습을 굽어보면 어찌 창연(愴然)히 옛일을 생각하며 근본을 잊지 않으리라는 마음을 미루어 화목하는 도에 이르면 거의 이 집 이름을 저버리지 아니함이 되리라 이에 서문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