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 선세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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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원강당 중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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惟我平章洞立宗院之議厥惟久矣 景廟甲辰始建講舍而未克中撤吾宗之慨然爲如何哉追遠之誠愈往愈鬱當宁丙午京鄕宗中同心一力先建賢宇己酉繼立講舍與神門而不幸値歉年遷延日月至丙辰三月末丁始享先祖文安公宗中相告曰既立祠於始祖卜居之地而不享 始祖只祭文安公大失事體始於丁巳五月仲丁設始祖位於文安公位之上煌煌一祠祖孫同享濟濟苗裔一心奉誠嗚呼盛哉舊有講舍幾至傾圮祭畢僉議付不侫以重修之任固辭不得三閲月而訖工瓦材則下淸之南菴也財穀則宗中之名錢也噫去去益勉來來如斯則此齋當與宇宙偕老豈有荒蕪而塵廢哉正堂三間軒窓廣豁東南房室牖戶開朗春秋可以會僉宗敦誼叙倫冬夏可以集學士講文誦禮仰觀賢宇先靈有依顧瞻遠近靑襟得所鄒魯餘風豈不重睹於今日也若不然而未免哺啜浪游之所則大非肯構之本意盍相與勉旃

後孫 性溵 記

 

[譯文] 우리 평장동에 종원(宗院)을 세우자는 논의가 있은지 오래더니 경종갑진(景宗甲辰:1724)에 처음 강사(講舍)를 세우려다가 완공하지 못하고 중지하니 종인(宗人)들의 서글픔이 어떠하겠는가 추원(追遠)하는 정성이 갈수록 더욱 마음에 맺히었다. 정조병오(正祖丙午:1786)에 경향(京鄕)의 종중(宗中)이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하나로 뭉쳐 먼저 사당(祠堂)을 세우고 4년 뒤 기유(己酉:1789)에 이어서 강사(講舍)와 신문(神門)을 세우다가 불행히 흉년을 만나 세월이 천연(遷延)되었다.

 

병진(丙辰:1796) 3월 말경에야 비로소 선조(先祖) 문안공(文安公)을 봉향(奉享)하니 종중에서 서로 말하기를 “이미 사우(祠宇)를 시조공(始祖公)이 복거(卜居)하던곳에 세웠는데 시조공(始祖公)은 봉향(奉享)하지 아니하고 문안공(文安公)만 봉향(奉享)하는 것은 사리(事理)에 부당하다.”하므로 1797년 5월 중정(仲丁)에 시조공(始祖公) 위를 문안공 위(文安公位)의 상위(上位)에 모시니 휘황(煇煌)하고 거룩한 사당(祠堂)에 조 손(祖 孫)분을 함께 모시고 많은 후손들이 한 마음으로 제사(祭祀)를 받드니 아 - 진실로 융성(隆盛)하도다.

예부터 강사(講舍)가 있었으나 거의 낡고 퇴락(頹落)함에 제사를 마친 후 공의(公議)가 강사를 중수(重修)하여야 한다고 그 중수하는 책임을 나에게 맡기니 고사(固辭)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3개월 후에 준공하였는데 기와와 재목은 하청(下淸)의 남암(南菴)에서 들여오고 곡식과 돈은 종중의 명전(名錢)으로 충당하였다.

 

아 - 갈수록 더욱 힘쓰고 정성을 모으면 이 집은 우주(宇宙)와 함께 시종(始終)을 같이할 것이니 어찌 황무(荒蕪)하여 진토(塵土)에 묻힐 일이 있겠는가 정당삼간(正堂三間)은 헌창(軒窓)이 광활(廣闊)하고 동남쪽 방과 마루는 문이 활짝 밝으니 춘추(春秋)로 첨종(僉宗)을 모아 돈의(敦誼)의 정과 윤강(倫綱)을 펼만하며 겨울과 여름에는 학사(學士)를 모아 글을 강(講)하고 예(禮)를 논할 만 하도다.

 

사당(祠堂)을 우러러보니 선대(先代)의 영령(英靈)들이 의지할 곳이 있고 원근을 살펴보니 유생(儒生)이 돌아갈 곳이 있으니 추로(鄒魯:공자의 향리 이름)의 여풍(餘風)을 어찌 오늘에 거듭 봄이 아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고 주식(酒食)으로 낭유(浪遊)하는 곳이 된다면 긍구(肯構)하는 본의에 크게 어긋날지니 어찌 서로 힘쓰지 않으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