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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신라왕자 유허비 음기 |
光州治之西北三十里負佛臺山對瑞石而有所謂平章洞卽古之西一洞而我始祖新羅王子金公之遺墟也王子諱興光當羅季知宗國將亂遯于玆金氏籍光山始此自子諱軾相繼爲平章者八人是故改洞號曰平章歷高麗入我朝子孫益蕃昌名卿大儒奕奕相望此固由於王子之潜光毓德以燾其後而抑其山川靈秀之氣亦有所助焉者耶噫王子之墓世遠失所在則後人之髣髴想慕者獨此遺墟在耳深懼其愈遠而失傳也遂謀於宗人伐石而識之
崇禎後再丁巳 月 日立 서기1737년 後孫 通政大夫 弘文館副提學 鎭商 謹書
[譯文] 광주(光州)고을 서북 30리에 불대산(佛臺山)을 짊어지고 서석산(瑞石山)을 안대(案對)한 이른바 평장동(平章洞)이 있으니 곧 예전 서일동(西一洞)이요 우리 시조(始祖) 신라왕자 김공(金公)의 유허(遺墟)이다.
왕자(王子)의 휘(諱)는 흥광(興光)이니 신라말(新羅末)에 종국(宗國)이 장차 난리가 있을줄 짐작하고 이곳에 둔거하였으니 김씨(金氏)의 적(籍)을 광산(光山)으로 함이 이때부터이다. 아들 휘(諱) 식(軾)으로 부터 이어서 여덟분의 평장사가 나왔으니 이러므로 동호(洞號)를 평장동(平章洞)이라 하였다.
고려를 지나 조선조에 들어와서 자손이 더욱 번창하여 이름난 상신(相臣)과 큰 선비가 혁혁(奕奕)하게 서로 이으니 이는 진실로 왕자공(王子公)이 감추어진 빛과 기른 덕(德)이 후손을 덮어 줌이요 또한 산천(山川)의 영수(靈秀)한 정기(精氣)가 도와 줌이로다. 아 - 애처롭게도 왕자공(王子公)의 묘소(墓所)가 실전(失傳)될까 두려워 종인(宗人)들과 모의(謀議)하여 돌을 깎아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