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 선세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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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광산현 제영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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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縣乃新羅時刺史官也玆時王子金興光預知將有亂離出作庶人來于此地卜西一洞而居焉適生一子軾其名角于其職今平章之秩也軾生吉當是時新羅敬順王來臣聖祖則其興光之預知者豈不智哉吉以奇偉之策事我聖祖統合時佐成王業卓立大功 故賞以三重大匡稱功臣生左僕射順順生平章文貞公策策於光廟擢天塲獨步榜頭上特開儀鳳門賜以內馬令紫門指諭扶鞍而出以示後人生平章貞俊貞俊生門下侍中文安公良鑑良鑑熙寧甲寅使於大宋模畫太廟國子圖而還蘇東坡作詩贈之乞與三韓使新圖到樂浪生平章忠貞公義元乃玄祖也後人興光王子所居之地多出平章洞號曰平章傳之至今僕今提按到此如此其叙事者非敢好事也此縣雖吾之內鄉接朝累世故縣人未知本末由是出此言也請後來無誚詩曰文貞公是海東賢獨步天場後世傳承蔭此身提按到平章一洞尙依然

 

大德 11年 丁未 6月  日  서기1307년 提按 黃臺典誥 金珥 書

 

[譯文] 이 고을은 신라 때 자사관(刺史官)이 있던 곳이다. 이때에 왕자 김흥광(金興光)이 장차 난리가 있을 줄을 알고 왕궁을 버리고 서인(庶人)이 되어 이 땅 서일동(西一洞)에 와서 사셨고 마침 일자(一子)를 낳아서 식(軾)은 그 이름이요 각간(角干)은 그 벼슬이니 지금의 평장사(平章事) 품질(品秩)이다.

 

식(軾)이 길(吉)을 낳았으니 이때에 신라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항복 하였으니 흥광(興光)께서 지혜롭지 아니하리오. 길(吉)이 기위(奇偉)한 계책으로 고려태조(高麗太祖)를 도와 왕업을 이루고 큰 공을 세우니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주어 공신이라 칭하였다.

 

길(吉)이 좌복야(左僕射) 순(順)을 낳았고 순(順)이 평장(平章) 문정공(文貞公) 책(策)을 낳으니 책(策)이 광종조(光宗朝)에 문과(文科)에 장원(壯元)하므로 임금이 특별히 의봉문(儀鳳門)을 열고 말(馬)을 주어 마부(馬夫)로 하여금 고삐를 잡고 나가게 하여 후세에 모범을 보였다.

 

책(策)이 평장사 정준(貞俊)을 낳고 정준(貞俊)이 문하시중 문안공(門下侍中文安公) 양감(良鑑)을 낳으니 양감(良鑑)이 희영갑인(熙零甲寅:1074)에 송(宋)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들어가 태묘(太廟:나라역대 임금의 사당)와 국자도(國子圖:공자의 사당이니 지금의 성균관이다)를 그림으로 그려 가지고 돌아오자 소동파(蘇東坡)가 시(詩)를 지어주며 이르기를 “삼한(三韓)사신에게 주노니 새 그림이 낙랑(樂浪)에 가는 도다.”하였다.

 

양감(良鑑)이 평장사 충정공(忠貞公) 의원(義元)을 낳으니 의원(義元)은 나의 현조(玄祖)이다.

 

후세 사람들이 왕자공(王子公)의 살던 곳에 평장사가 많이 나왔다하여 동호(洞號)를 평장동(平章洞)이라 하여 지금까지 전(傳)하여 온다.

 

내가 이제 제안(提按)으로 여기에 와서 이렇게 사연을 쓰는것은 내가 일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이 고을은 비록 나의 고향이지만 입조(入朝)한지 여러 대가 되었으므로 이 고장 사람들이 본말(本末)을 알지 못하니 이런 까닭으로 이 말을 쓴다. 뒤에 오는 사람들은 꾸짖지 말기 바라노라.

 

시(詩)에 이르되 문정공(文貞公)은 해동(海東)에 어진 분으로 천장(天場)을 독보(獨步)하여 후세(後世)에 전(傳)하였네, 음덕(蔭德)입은 이 몸이 제안(提按)으로 돌아오니 평장동 한 마을이 예전과 다름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