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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평장동의 연혁과 개력 |
평장동은 신라의 무주(武州)의 서일동(西一洞)이니 본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라 신라가 병합하여 도독(都督)을 두었고 경덕왕 16년에 무주라 개칭하고 진성왕 6년에 견훤(甄萱)이 습거(襲據)하여 후백제라 칭(稱)하였다.
고려 태조 23년에 광주(光州)라 칭하고 성종 15년에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뒤에 낮추어 해양현령(海陽縣令)을 삼고 또 나주(羅州)에 속(屬)하고 고종 45년에 익주사(翼州事)로 승격하고 원종 초에 무진주로 승격하였다가 다시 낮추어 광산현(光山縣)을 삼고 충선왕 2년에 화평부(化平府)를 삼고 뒤에 익양군(翼陽郡)으로 고치고 공민왕 11년에 무진부로 고쳤다가 혜종의 휘(惠宗 諱)를 피하여 무(武)를 무(戊)로 고치고 22년에 고쳐 목사(牧使)를 두었다.
조선조에도 그대로 두었다가 세종 12년에 무진군으로 강등하고 문종 원년에 복구하여 주(州)로 하고 성종 20년에 서석현(瑞石縣)으로 강등하여 현감을 두고 연산주 7년에 다시 광주로 하여 목사를 두고 인조 2년에 광산현으로 강등하였다가 12년에 다시 주로하고 숙종 27년에 현으로 강등되고 33년에 다시 복구하여 광주로 하였다가 지금은 평장동이 담양군(潭陽郡)에 속하였으니 경술국치후 군(郡) 폐합당시의 일이다.
우리 왕자공께서 신라계세에 피난하시어 무주의 서일동에 계시게 되므로 그후 자손이 세거한 것이다. 휘(諱) 길(佶)에 이르러 비로소 여조(麗朝)에 출사(出仕)하여 사공(司空)을 지냈고 자손이 대대로 벼슬하여 평장이 많이 나왔으므로 동호를 평장동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평장동을 떠난 지 어느 때인지 알 수 없다. 고려 충렬왕 33년 원(元) 대덕 11년에 전고공(典誥公) 김이(金珥)가 지은 광산현제영시서(題詠詩序)에 이르기를 왕자공 소거지에 평장이 다출하였음으로 평장동이라 하여 지금까지 전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이 고장이 비록 우리 내향(內鄕)이지만 접조(接朝)한지 누세(累世)이므로 현인(縣人)이 본말을 모른다고 하였다.
당시에 우리 김씨는 이 동에 거주하는 이 없고 다만 폐허로써 동호만 남았을 뿐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사공공으로 부터 여조에 세사(世仕)하여 경도(京都)에 살면서 평장이 많이 나셨는데 서일동이 그 고향이기 때문에 평장동이라 칭한 것인가 한다.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자연히 타인의 소점이 되었으나 왕자공의 유허요 김씨의 구지(舊址)라는 전설은 없어질 수 없다.
조선조 시대에 간혹 이 동에 래거(來居)한 사람이 있으나 마침내 구지를 지키지 못하였고 성종 2년에 감찰공 김현뢰(金賢賚)가 지은 평장동 유허서는 광산현 제영시서 후로는 최고문헌인바 “평장일동이 촌토척지라도 모두 우리 선조의 세전지물이라”하였고 “우리 선조께서 구학강례하고 수조관덕(垂釣觀德)하시던 곳이 완연히 남아 있으나 자손들이 계승하지 못하였고 지금 내가 이동에 세거하여 선조의 유지(遺址)인 줄 알면서도 능히 계서(繼緖)하지 못하니 통탄할 일이다. 대강 그 전말을 기록한다.”하였으니 평장동 유지(遺址)가 타인의 소점(所占)이 된것을 알 수 있다.
숙종초에 문충공 서석 김만기(金萬基)가 힘을 모아 구지(舊址)를 모두 찾았으나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증빙할 만한 문헌이 없고 또 다시 타인의 소점이 되고 말았다.
경종 2년에 진사 김광수(金光洙) 김사정(金泗鼎) 2공이 제종으로 더불어 건사통문(建祠通文)을 발송하고 영조 원년에 강사를 세우려다가 중지하였고 참찬공 퇴어자(退漁子) 김진상(金鎭商)이 세대가 멀어질수록 전실할까 염려되어 호남 제종에게 협의하여 입석 건각하였으니 즉 영조 14년 4월에 지추공(知樞公) 김진동(金鎭東)과 봉사공(奉事公) 김복택(金福澤)과 현감공 김성택(金聖澤)으로 더불어 입비발문하여 그 후 3년에 준공한 것이니, 유사(有司)는 김천신(金天申) 김득서(金得緖) 2공이요 통덕랑 김회풍(金會豊)이 명(銘)하였다.
정조 10년에 경향제족이 합심하여 먼저 현우(賢宇)를 세우고 그 후 4년에 이어서 강사와 신문(神門)을 세우려다가 세흉으로 천연하여 7년 후 3월에 이르러 비로소 문안공 단위(單位)를 모시고, 다음해 5월에 시조 위를 봉안하여 문안공을 봉향하고 제후에 강사중수를 발의하고 김성은(金性溵)이 기(記)하였다.
순조 33년에 경종(京宗)으로 부터 비각중수를 발통(發通)하고 그후 6년에 목사공 기묵(箕黙)이 기하였다. 15년에 승지공 김재경(金在敬) 이 나주목사로 재임시에 전(田) 6두락을 매입하고 4간사(間舍)를 설치하여 비각을 수호케 하였는데 구 강사는 어느때 퇴락되었는지 그 때는 이미 강사가 없었던 것이다.
고종 22년에 공의 아들 김윤현(金胤鉉)이 광주목사 재임시에 종회소가 없음을 개탄하면서 솔선하여 봉금을 희사하고 한편 호남 제종의 협조를 얻어 당우 10간과 고사 8간 문랑 5간을 강사 구지에 설립하고 문헌공 김영수(金永壽)가 취사당(聚斯堂)이라 명하였다.
고종 25년 5월에 상량문을 찬하고 참판공 김영목(金永穆)이 기하고 판서공 김수현(金壽鉉)이 발(跋)하고 공이 자서(自序)하였더니 준공을 못하고 남원으로 전임하면서 장성군수 김오현(金五鉉)에게 부탁하였고 유사 김상수(金商洙) 김수익(金壽翼) 김용현(金瑢鉉) 김재응(金在膺) 등이 그 역을 맡아 준공하니 장성공이 기하고 절도사 김중현(金重鉉) 대산재(大山齎) 김상수(金商洙) 감찰 김진현(金珍鉉)등이 혹은 기(記)도 하고 서(序)도 하였다.
이로부터 자손이 춘추로 회합하게 되고 후 30년 경신(庚申)에 특진관 김각현(金珏鉉)이 유사 김민현(金珉鉉) 김용주(金容柱) 김진현(金珍鉉) 등으로 더불어 설단하여 매년 10월 1일에 왕자공을 제사지내게 되었다.
동년에 김직현(金直鉉)등이 동구비를 세우고 후 4년 계해(癸亥)에 판서공 김철현(金喆鉉)이 김영관(金永寬)등으로 더불어 제단비를 세우고 후 2년 을축(乙丑)에 평장동지(平章洞誌)가 편성되니 이에 문헌이 대강 구비되고 실적(實蹟)이 고찰할만 하여 세도(世道)가 변천되더라도 영원히 전승(傳承)할 수 있게 되었다.
1954년 갑오(甲午)에 김원천(金源千), 김창현(金昌鉉), 김동석(金同錫) 등 제종(諸宗)이 모의순동(謀議詢同)하여 1956년(丙申)에 경모재(敬慕齋) 건축에 착공, 동년 8월에 준공하였는데 이는 실로 나주 김동석(金銅錫)의 치성(致誠)의 결과라 하겠다.
1978년 10월에 도유사가 된 김영환(金永煥)이 광주 근교에 종회소(宗會所)를 설립할 필요가 있다고 착안하여 각처 제종의 협찬을 받아 광주시 오치동 650번지에 부지(敷地) 134평을 매입하였고, 후임 도유사 김보균(金寶均)이 주야로 진력하여 연건평 175평의 현대식 3층건물을 건립하니 이가 곧 현존 광산김씨 대종각이며 실로 오김(吾金) 종중의 일대경사라 할 것이다.
뒤이어 1982년 임술(壬戌)에 후임 도유사로 선임된 김용순(金容順)이 “광산김씨 평장동중수사업추진위원회”라는 기구를 구성하여 오김의 총본산인 이곳을 일신하겠다고 방대한 연차계획을 수립, 이후 김관순(金寬淳), 김원만(金源万), 김성섭(金成燮) 등 4대 도유사가 1990년 경오(庚午)까지 계속 사업을 추진 완전실천 이행하였다
※ 편집자 주
① 작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1990년대의 기록임은 분명하다.
② 1990년 당시 도유사 용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