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 선세 문헌

본문

16. 단비명

back.gif

 

원문 한문 생략

우리시조(始祖)신라왕자(新羅王子)金公 휘 흥광(興光)께서 신라계세(新羅系世)를 당하여 나라가 장차 난(亂)이 일어날 줄 알고 하향(遐鄕:고향)에 둔적(遯跡:피하여살다)하여 광주북편(光州北便)불대산하(佛臺山下)西一洞에 일구(一區:한편)를 복득(卜得:얻어사시다)하니 金氏의 적(籍:본관)을 光山으로 함이 이로부터라

 

터를 끼쳐주고 덕(德)을 심어 자손이 세거(世居:이어살다)하여 八代를 이어서 평장(平章)이 되었으므로 동호(洞號)를 평장동(平章洞)이라 칭(稱)하고 고려(高麗)로부터 아조(我朝)에 이르기까지 후손이 더욱 번창(蕃昌)하여 팔역(八域:팔도강산)에 둘러 있은 즉 오김(吾金)이 이동에 불거(不居)하고 빈터로 된지 언제부터인가!

 

왕자부군(王子府君)의 세대(世代)가 아득하고 유적(遺蹟)이 인멸(湮滅:없어지다)하였는 즉 후인(後人)이 상모(想慕:생각하고흠모함)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유허(遺墟:옛터)만 맘아 있을 뿐이다.이러기에 일찍이 사당(祠堂)을 세우고 원우(院宇:원사)를 설립(設立)한 일이 있었건만 필경(畢竟)은 모두 철폐(撤廢)되고 후에는 다시 잠잠 하였으니 아! 세정(世情:세태)의 변천(變遷)과 인사(人事)의 흥폐(興廢:흫망)를 알 수 없는 것인즉 후일에 오늘을 생각하는 것이 오늘에 옛일을 생각하는 것과 다름이 있으랴!

 

경신년(庚申年)에 사제(舍弟:아우) 특진관 珏鉉이 생각한바 있어 개연(蓋然)히 분발(奮發)하여 경향제종(京鄕諸宗)에게 발문(發文)하여 珉鉉, 容柱, 珍鉉 삼유사(三有司)로 더불어 유허(遺墟)에 설단(設壇)하여 매년 가을에 종족(宗族)이 여기 모여서 향사(享祀)를 모시니 추원보본(追遠報本조선을기고 흠모함)의 도(道)와 존조돈종(尊祖敦宗:선조를 높게 받들고 종족간에 화목함)의 의(義)가 거의 성취된지라. 신(神)과 인(人)이 서로 정(情)을 느끼고 예도(禮道:예와도리)가 흡족(洽足)스러운 즉 때와 그 사람이 있어야 일이 작정(作定)되는 것을 짐작 할 만 하도다.

 

다만 단소표기(壇所表記)가 미비(未備)되어 항상 유감(遺憾)스럽게 생각하나 일이 중난(重難:무겁고 어려움)하고 힘이 부족(不足)하여 그럭저럭 수년간(數年間)에 특진관(特進官)이 이미 작고(作故)하므로 일이 더욱 잠잠하더니 금춘(今春)에 장성백암종인(長城白岩宗人) 永寬이 三有司로 더불어 협의(協議)하여 재물(財物)을 내어 돌을 구입(購入)하여 못 다한 일을 마치고저 나에게 찾아와 언급(言及)하니그 성심(誠心)을 공경하고 그 일을 옳게 여겨 대강 전말(顚末)을 기록하고 드디어 명(銘)하여 이르되 저 불대산(佛臺山)을 바라보니 서석산(瑞石山)과 맞서도다. 여기 와서 둔거(遯居)하신 이는 신라왕자(新羅王子)님이시라. 빛을 쌓고 덕(德)을 길러 후손(後孫)을 복되게 하도다.

 

번창(繁昌)하고 혁혁(爀爀)함이 동사(東史:우리나라역사)에 으뜸하도다. 세대(世代)가 유원(悠遠:오랜세월)하여도 유지(遺址)는 보존(保存)하도다. 종족(宗族)들이 단(壇)을 쌓고 향사(享祀)를 받들도다. 맑은 향기 먼 자취가 생각하고도 남는다. 돌에 명사(銘詞:글)를 세기니 천만년 길이 전하리로다.

歲 癸亥 四月  日 后孫嘉善大夫前漢城裁判所判事 喆 鉉 謹撰

後孫嘉善大夫前吏曹參判  永悳 謹書

后孫 參奉               永寬 謹竪

后孫聚斯堂有司          珉鉉 容柱 珍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