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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광산김씨(평장동) 세수비문 |
원문한문생략
선세(先世)의 발상지(發祥地)인 옛터를 지켜서 후손에게 생성(生成)하는 내력을 알게 하는 것은 뿌리를 북돋음으로 가지와 잎을 번성하게 함이라 우리 광산김씨(光山金氏)는 태보공(太輔公)을 득성(得姓)한 시조로 삼고 신라왕계(新羅王系)를 이어 말기(末期)에 이르러서 나라가 장차 위태하니 왕자공(王子公) 휘(諱) 흥광(興光)께서 그 징조(徵兆)를 미리알고 서인(庶人)이 되어 인하여 무주(武州) 서일동(西一洞)에 사셨는데 후손에서 팔평장사(八平章事)가 이어서 나왔으므로 마을 이름을 평장동(平章洞)이라 하였다.
고려(高麗) 충열왕(忠烈王) 정미(丁未)년에 전고공(典誥公) 휘(諱) 이(珥)가 지은 광산현제영시(光山縣題詠詩)의 서문(序文)에 이르시되 왕자(王子)께서 살던 곳에서 평장사(平章事)가 많이 났으므로 그 마을을 이름하여 평장동(平章洞)이라 하여 지금까지 전한다 하시였고 또 말씀하시되 이 고을은 비록 우리 고향이지만 여러 대를 조정에 출입하였으므로 그 내용을 고을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하셨으니 아마 사공공(司空公)으로부터 고려(高麗)에 벼슬하여 경도(京都)에 사시면서 평장사(平章事)가 많이 나니 그 마을 이름을 평장동(平章洞)이라 했으나 해가 오래 되어서 자연히 남이 점령한바 되었으나 왕자(王子)의 유허(遺墟)요 김씨(金氏)의 옛 터라는 말은 없어지지 않았다.
삼가 지켜온 내용을 살펴보면 조정이 바뀐 뒤 성종(成宗) 신묘(辛卯)년에 감찰공(監察公) 휘(諱) 현뢰(賢賚)의 평장동유허(平章洞遺墟) 서문(序文)에 이르되 평장동(平章洞) 한마을의 한줌의 흙과 한치의 땅이라도 우리 선조가 대대로 전한 물건 아님이 없는데 지금의 이 불초(不肖)는 대대로 이 땅에서 살면서 잇지 못하니 유감이라 하셨으니 후손의 추모(追慕)하는 정이 이러 하도다.
경종(景宗)二年에 진사(進士) 광수(光洙) 사정(泗鼎) 두 분께서 사당 세우자는 통문을 냈고 영조(英祖) 원년에 참찬공(參贊公) 퇴어(退漁) 휘(諱) 진상(鎭商)께서 돌을 세우고 집을 짓자는 의논을 하였고 十四年 정사(丁巳)에 지추공(知樞公) 진동(鎭東)과 봉사공(奉事公) 복택(福澤)과 현감공(縣監公) 성택(聖澤)께서 비 세우자는 발문(發文)을 내고 다음 三年 기미(己未)에 준공(竣工)하였으며 정조(正祖)十年 병오(丙午)에 먼저 사당을 세우고 다음 四年 기유(己酉)에 강사(講舍)와 사당정문을 세웠고 병진(丙辰)년 三月에 처음 문안공(文安公)을 제사하고 이듬해 정사(丁巳) 五月에 시조의 위패를 모시고 문안공과 함께 향사하였고
제사 뒤에 강사(講舍)를 중수하자는 의논이 있었고 순조(純祖)三十三年 임진(壬辰)에 서울의 일가들로부터 비각을 중수하자는 발의(發議)가 있었으며 고종(高宗)二十二年에 승지공(承旨公) 휘(諱) 재경(在敬)의 아드님 윤현(胤鉉)께서 광주(光州) 목사로 계실 때에 집 십칸과 고사 팔칸과 문간 오칸을 강사(講舍) 옛 터에 세우니 문헌공(文獻公) 영수(永壽)가 취사당(聚斯堂)이라 이름 하였고 신묘(辛卯)년에 준공(竣工) 윤현(胤鉉)공의 서문(序文) 에 진실로 집을 이루고도 일가를 모으지 아니하면 어찌 이를 취하랴. 경조(慶弔)도 반드시 여기서 하고 소어(笑語)도 반드시 여기서 한다면 집 이름이 만족하다 하셨다.
그 뒤 三十年 경신(庚申)에 특진공(特進公) 각현(珏鉉)께서 왕자공(王子公)의 단(壇)을 세워 매년 十月一日에 향사하고 이어서 동구비(洞口碑)를 세웠으며 그 다음 四年 계해(癸亥)에 제단비(祭壇碑)를 세웠고 그 뒤 三年 을축(乙丑)에 평장동지(平章洞誌)가 이루어졌으니 이렇게 후손이 조상을 위하여 마음을 이어서 혹 비를 세워서 그 사적을 기록하고 또 단(壇)을 세워 그 영혼에 제사하며 해가 오래되어 바람에 파손되면 수리하고 달이 깊어 비에 씻기면 복원(復元)하여 보전하였다.
근자 계해(癸亥)년 중춘에 일가들이 한집에 모여 취사당중수추진위원회(聚斯堂重修推進委員會)를 결성하고 당시의 도유사(都有司) 용순(容順)을 위원장(委員長)으로 하여 이 역사를 맡게 하였고 그 후임으로 관순(寬淳)과 원만(源万) 성섭(成燮) 도유사(都有司)들이 서로 이어서 추진하니 七年이 지나서 취사당(聚斯堂)이 중건(重建)됐고 옛 집은 유허비각(遺墟碑閣)의 서편에 옮겨 세우고 이름을 수존재(修存齋)라 하였으며 민가(民家) 다섯 채를 철거하여 경내를 확장하고 경모재(敬慕齋)와 문간을 중수하고 단소(壇所) 외계를 고치고 원장과 봉심(奉審) 계단을 새로 쌓았으니 모든 사업에 공정을 완성한 것은 기사(己巳)년 가을이었다.
이것은 여러 일가들의 성금과 겸하여 임원들이 힘을 다하여 감독하였으므로 이에 왕자공(王子公)께서 처음 터로 정한 땅을 잘 지켰으며 평장동(平章洞)에 대대로 살던 인연을 길이 전하게 되니 자손들의 음덕을 입어 창성하여 사해(四海)에 두루 살고 남은 덕택을 힘입어 집안이 번성하여 널리 세상에 들리니 이는 조상들의 음덕을 바탕으로 하지 아니함이 없도다.
지금 비에 깊이 새겨서 만세에 보존할 계획으로 나에게 글을 청하므로 삼가 위와 같이 쓰니 근본에 보답하는 마음에 도움이 되고 일가와 돈목하는 의를 발전하게 된다면 참으로 이것은 우리문중에 융성한 일이로다.
서기 1989년 (己巳)菊秋節 后孫 成均館長 敬洙 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