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 선세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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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수존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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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한문 생략

수존재(修存齋)는 본시(本是) 취사당(聚斯堂)의 옛 건물(建物)로써 시조왕자공(始祖王子公) 유허(遺墟)에 있었던바 이곳이 우리김씨(金氏)가 대대(代代)로 살았던 곳이다. 도학(道學)과 훈작(勳爵높은벼슬과지위)이 연세배출(連世輩出대를이어나오다)하여 훤혁어려(煊爀於麗빛나고아름답다)하니 수반어일(數班於一양반의의뜸)하고 사실(事實)이 소현(昭顯현저히빛나다)하므로써 이에 사승(史乘역사에오름)하여 불부첩설(不復疊設빛나는글과말씀)하였다.

 

자시(自是) 이후 미천년(以後彌千年이로부터 천여년후)에 후손 윤현(胤鉉)이 광주(光州) 목사(牧使)로 부임(赴任)하여 자손(子孫)들이 모일 장소가 없음을 개탄(慨歎)하여 자신의 녹봉(祿俸보수)중에서 일부를 먼저 내어놓고 호남제종에게 청하여 재원(財源)을 염출하고 이 집을 지으니 때는 고종(高宗)(二十三年) 을묘년(乙卯年)(書記一八八五年)이니 지금으로 부터 백십년전(百十一年前)이다.

 

이후로 일가들이 취사당(聚斯堂)에 모여 천륜의 따뜻한 정을 펴고 인도(人道)의 예의(禮儀)와 준칙(準則)을 이행하더니 그 후 서기 1986년(書記一九八六年)(丙寅)에 후손 용순(容順)이 도유사(都有司)를 맡았을 때에 평장동(平章洞)을 정화(淨化)하자는데 종의(宗議) 제발(齊發)하여 제종(諸宗)이 합심협력(合心協力) 성력(誠力)을 다하고 대우(大宇) 우중(宇中)회장이 큰 성금(誠金)을 獻誠하여 옛집을 헐고 그 곳에 취사당(聚斯堂)을 신축(新築)하였다.

 

제도(制度)는 예나 같으나 전보다 훨씬 빛나며 웅장(雄壯)하고 또 舊堂을 취사당 오른쪽에 이건(移建)하여 수존제(修存齊)라 현액(懸額)하고 좌우에는 방실(房室)이며 가운데 는 대청(大廳)이라. 그러므로 매년 향사시(享祀時)에 많은 제관(祭官)들의 거처(居處)와 숙식(宿食)이 참으로 편의(便宜)해졌다.

 

주위(周圍) 환경(環境)이 날로 아름다움을 더해가니 진실로 우리 김씨(金氏)의 대성사(大盛事)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든 자손(子孫)은 이에 만족하지 말고 재(齋)와 당(堂)을 마련한 것으로서 끝일 것인가 건축(建築)은 말이요 수존(修存)은 본이라. 옛 사람이 말하기를 선조(先祖)의 덕(德)과 유업(遺業)을 닦고 보존하라 하니 오직 우리 일가들은 이 집에 오르고 내릴 때 주량(柱樑)의 공고(鞏固)함과 헌창(軒窓)의 화려(華麗)함으로 만족히 여기지 말고 조상의 어질고 후덕(厚德)함과 도덕(道德)과 훈업(勳業빛나는업적)을 이어 받아 아버지는 아들에게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전(傳)하여 전함이 무궁(無窮)하면 이 재(齋)는 반듯이 불대산(佛臺山)과 더불어 영원(永遠)토록 무궁(無窮)하리라.

 

이로써 우리 김씨(金氏)의 명성(名聲)이 천하만방(天下萬邦)에 크게 진동(振動)하기를 간절(懇切)한 마음으로 기원(祈願)하노라. 재(齋)를 지은지 오래 되었으나 기(記)가 없음을 한탄(恨歎)하고 나에게 기(記)를 권(勸)함에 여러 가지로 고사(固辭)하였으나 자손된 도리(道理)로써 그 청(請)이 완강함에 더 이상 사양(辭讓)치 못하고 세수(洗手) 제계하고 이 기(記)를 써서 붙인다

 

大韓光復四十三年 서기1988년 戊辰立秋節 后孫  淳  澤 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