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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취사당기 |
在昔虞官叙秩宗之典, 周誥著展親之文, 降及眉陽蘇氏記以譜亭, 吳州范氏置以義宅, 則追先惇族之禮, 其來尙矣。 嗚呼! 湖左之光山, 古稱海東之勝區, 而其中平章一洞, 北受佛臺之淸淑, 南控瑞石之精采, 寔是吾祖先鍾靈毓慶之舊址也。 雲仍之于京于鄕, 大賢焉世襲之, 名卿焉家傳之。其他坊曲之散居也, 擧皆簪纓章甫之綿綿延延, 則其爲子孫宗族者, 孰無一瞻一叙之願哉! 顧余遠裔也後生也, 況居在畿甸千里之地, 只切欽慕者雅矣。何幸恩渥偏重南麾棠岳。 丁亥秋, 歷拜宗丈五鉉氏于潭州之衙軒, 始聞聚斯堂設始之顚末, 此乃宗丈胤鉉氏之爲本牧時所發論創建之事也。僉同詢謀, 因以成事, 余亦樂聞其事, 而有司商洙, 甫適在座, 與之偕往周覽, 夙願始償。 然棟宇之輪焉, 垣墉之井然, 若非有司之誠力, 昔者未遑之事, 豈可竣之於今者耶! 還衙卽時, 自捐百金, 以爲助役, 是雖萬一之補, 而語其期會, 則可謂千載一時, 於戲休哉! 其後幾年, 又除法聖運使之任, 又未幾, 承康營閫鉞之命, 則本道內數三遷歷, 何莫非先蔭之攸, 曁亦可爲閭里之有光。 旣同是事, 不可無一言而記之, 故敢揭數行, 以表楣末云爾。
歲在辛卯十一月下澣, 通政大夫兵馬節度使中鉉記。 雲仍之于京于鄕, 大賢焉世襲之, 名卿焉家傳之。其他坊曲之散居也, 擧皆簪纓章甫之綿綿延延, 則其爲子孫宗族者, 孰無一瞻一叙之願哉!
1891 11월 하순, 통정대부 병마절도사 김중현 쓰다.
도올 선생 번역문
먼 옛날 순임금 때 9관 중의 하나인 우관이 질종(종묘제사 담당관)의 전례를 서술하였고, ????상서???? 중의 주고周誥는 친족의 정분을 중시하는 글을 싣고 있다. 후대에 이르러서는 미양의 소씨(蘇洵, 1009~1066, 소동파의 아버지)는 일가문의 세계를 밝히는 보학의 체계를 완성하였고, 오주의 범씨(范仲淹, 989~1052)는 본인의 녹봉을 문중에 희사하여 의택(일종의 구제기관)을 세웠다. 이로 상고컨대 선조를 추념하고 일족의 우의를 돈독하게 하는 예는 그 내원이 오래된 것이다.
오호라! 전라좌도의 광산은 고래로부터 해동 명승지로 칭송되어 왔으며, 그 중에도 평장 일 동은 북으로는 조산 불대산 장군봉의 청숙한 기상을 받았고, 남으로는 안산 무등산 서석대의 정채로운 기운을 제압하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우리 선조들, 영활하고 빼어난 인재들을 끊임없이 길러낸 성스러운 옛 땅이다.
광산의 후손들이 서울에서 지방에서 모두 크게 일어나니, 대현大賢은 세습되었고 명경名卿은 출중한 가문의 전통에 따라 계속 배출되었다. 기타 방곡坊曲에 산거한 문중의 재사들도 모두 벼슬길에 올라 문중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갔다. 그러한즉, 그 자손종족 된 자로서 어느 누가 일첨일서(바라보면 그 광채를 서술하고 싶어한다)를 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먼 후손이요 후생일 뿐이로다. 하물며 중앙에서 천리 떨어진 편벽한 곳(중현은 본시 충북 제천에서 세거한 사람이었다)에 세거하였으니 이 개조묘에 관해서 단지 간절한 흠모의 정만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감당키 어려운 두터운 성은聖恩을 입어 전라도 해남, 풍천, 법성 등지를 지휘하는 장군이 되어 이곳을 찾아올 수 있었다.
정해년(1887) 가을(이때 중현은 해남현감이었다) 종장 오현씨를 담주(현재의 담양)의 관아 동헌에서 뵙고 처음으로 취사당을 건축하게 된 전말을 듣게 되었다. 이 건축공사는 이전의 종장 윤현씨가 본 고을의 목사였을 때 창건하는 일을 처음 논의하였고, 문중의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일을 도모하면서 대공사를 착수시켰다. 나 또한 이러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듣게 된 차에 마침 한 자리에 유사 상수가 있어 그와 함께 현장에 가서 둘러보았으니 이에 나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마룻대와 추녀 끝이 웅장하고, 나지막한 담이 가지런히 모습을 갖추고 있었으니, 유사의 정성과 노력이 없었다면 예전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이 대사업이, 어찌 지금 준공을 보게 되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으리오! 나는 관아에 돌아오는 즉시 스스로 백 냥을 기부하여 역사를 돕게 하였다. 나의 기부는 만분의 일밖에 안되는 작은 도움이지만, 기회로 말하자면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호기였으니, 아~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
그 후 몇 년이 지나, 나는 법성운사(수륙의 운반을 관할하는 직책. 중현의 정확한 직명은 법성첨사였다. 종3품)의 직책에 제수되었고, 또 얼마 되지 않아 강진 병영의 총책임을 맡은 장군의 명을 받았고, 전라도 내에서 여러 차례 임지가 이동되었다(전라도 지역에서 계속 높은 지위의 무관으로서 활약하면서 종2품 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 이 모든 나의 순탄한 벼슬길이 조상의 음덕이 아닌 것이 없고, 또한 이 평장마을의 광영이라 할 수 있다. 기왕에 모든 일이 이토록 잘 풀렸으니 어찌 한마디 여기에 남기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감히 몇 줄의 당기를 써서 문미 한 곳에 걸어놓아 문중의 광휘를 드러내노라.
신묘년(1891) 11월 하순, 통정대부 병마절도사 김중현 쓰다.
2019년 5월 일 절도사 중현의 증손 도올 용옥이 번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