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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기타 문화재 자료
(7) 자암 김구 (自庵 金絿) 글씨 |
조선조 중기의 효자 서도가 / 자는 대유 호는 자암, 현감 계문의 아들
자암 김구 선생이 쓴 두보시 소장기관 : 국립중앙박물관
7세에 석류시와 오작교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6세에 한성감시에 장원했고 1505년 생원진 사 양시에 장원했으며 1511년 문과에 장원했다.
사가독서한 뒤 홍문관정자 부수찬등을 거쳐 1519년 부제학에 올랐으며〈기묘사화〉즉 신무문의 사건을 만나 조광조 김정등과 함께 하옥된 뒤 남해에 유배되어 15 년간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풀려나와 귀향했다.
이때 2년 전에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난 사실을 알고 상심한 나머지 날마다 묘소에 나가 통곡하던 끝에 병사하고 말았다. 그는 유학을 크게 진흥시키는 한편 요순의 정치이념을 이상목표로 했고 글씨에 뛰어나 필력이 강건했다.
필법은 종유와 황희지의 때를 따랐으나 독자적인 필법을 체득했으므로 이를 인수체라 불렀다. 그러나 한때 중국인이 자기의 필묵을 매입해 갔다는 말을 듣고 즉시 글씨쓰기를 중단했기 때문에 세상에 전하는 필적이 드물다 한다.
뒤에 김사석이 연산군 수로 있을 때 도적의 망태에서 그가 쓴 시 30여 편이 수록된〈자암수필집〉을 발견했다고 하며 명필가 윤 백하는 그의 필법에 감동되어 그 체를 익히려고 붓을 잡았으나 오래도록 망설이기만 했다고 한다.
자암(自菴) 김구((金絿, 1488-1534))는 조선 중종(中宗) 때의 명신으로, 학문과 예술에 모두 깊은 소양 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특히 뛰어난 서예가이기도 해서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 양사언(楊士彦, 1517-1584), 한호(韓濩, 1543-1605)와 함께 조선 전반기의 사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그의 독특한 서풍을 일컬어 인수방에서 살았다하여 인수체(仁壽體)라고 한다.
해서는 육조시대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의 서예, 즉 위진시대의 예법을 근원으로 삼아 글씨의 묘를 얻었다. 그러나 큰 글씨 초서는 왕희지로부터 묘를 얻은 것이 아니라, 명대(明代)의 유행 서풍, 특히 장필(張弼)과 이동양(李東陽)의 초서 풍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 큰 글씨의 초서는 힘이 넘치는 필획과 동감(動感)이 커 마치 춤을 추는 듯하며, 양쪽 화면의 글씨 배치와 여백의 효과는 균형과 긴장감을 함께 느끼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