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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향토 문화유산
(2) 광산김씨 직제학공파 김약시 묘역(光山金氏直提學公派金若時墓域) |
경기도 광주시 향토문화유산 유형문화유산 제3호 | 위치 : 경기도 광주시 실촌읍 삼합리 332-1
19세 김약시(金若時)(양간공후/판군기감사공파) 고려말, 조선 전기의 충신, 아버지는 광성군(光城君)
정(鼎)이며 어머니는 숙신택주(肅愼宅主) 연안이씨(延安李氏)로 전법판서(典法判書) 방(昉)의 딸이다. 광 성군의 셋째 아들로서, 1382년(우왕9) 사마시에 합격하고 1383년(우왕10)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진현관직제학(進賢館直提學)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고 태조가 등극하자 부인과 함께 걸어서 광주 금광리 산 골짜기에 이르러 나무를 얽어 지붕으로 삼아 비바람을 막고 살았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의관을 괴이하게 여겨 이따금 와서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고 혹은 술과 음식을 가져다가 대접해도 받지 않으니 그가 살고 있 는 동네를 부전어동(不傳語洞)이라 불렀다. 항상 하늘을 쳐다보고 우울하게 상심하며 흐느끼나 사람들은 그의 뜻을 헤아릴 수 없었고 또한 그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태조가 수소문하여 공을 찾아 원래의 관 직을 주고 벼슬하게 하였으나 공은 병을 앓아 앞을 보지 못한다고 핑계하고 나아가지 않으므로 태조는 특 별히 성명방(誠明坊)에 있는 집 한 채를 손수 "송헌(松軒:이성계의 호)"이란 어호(御號)를 써서 하사하였지만 끝내 받지 않았다.
공은 일찍이 집안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좋지 못한 시기에 태어나서 종묘사직의 망함을 직접 보고도 죽지 못하고 또 훌쩍 속세를 벗어나 멀리 숨지도 못하는 것은 선인의 무덤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내 가 죽거든 곧 여기에 장사하되 봉분도 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고 다만 둥근 돌 두 개를 좌우에 놓아두어 망국의 천부임을 표시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하였다.
卒하자 자손이 그 말대로 하였다. 고상한 풍도와 절조는 길야은(吉冶隱) 제공(諸公)들과 대등한데 공은 다만 그 사적이 민몰(泯沒)되었기 때문이요 후인들 이 또 감히 포장천양하지 못하는 것은 공의 평소 뜻을 상하게 할까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공의 지조와 절개를 아는 사람이 적었던 것이다. 두문동 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의 한 사람이며, 조선조 순조 때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고 충정공(忠定公)이라 시호를 받았다.
장성의 경현사(景賢祠)와 무안군 해제면 매곡동의 모충사(慕忠祠),그리고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의 고려통일대전 배향되었다. 配는 정부인 여산송씨(礪山宋氏), 정부인 원주원씨(原州元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