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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문화재 자료
(21) 모선재 (慕先齋)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07호(논산시) | 위치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293
26세 김계휘(金繼輝)(양간공파/판군감사공파/의정공파) (1526∼1582).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岡), 아버지는 증좌찬성 호(鎬)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전의이씨로 정랑 광원(光元)의 딸이다. 세 살, 네 살 때 문자를 알고 일곱 여덟살 때 문의(文義: 글의 뜻)를 통하고 15세 이전에 경서와 사기를 다 읽었고 한 번 보면 거의 다 기억하였다.
1548년(명종 4) 정시 및 과시에 연이어 장원하니 전시에 직접 응시하라는 왕명이 있어 이듬해 정시에 장원하고 전시 을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정자가 되었고 곧 호당(湖當)에 뽑혔다. 이듬해 부정자를 거쳐 조금 있다가 예문관 검열, 홍문관 정자, 저작박사가 되었다. 1554년(명종 10) 부수찬, 지제교, 사간원 정언, 이듬해 병조좌랑, 성균관 전적, 이조좌랑이 되었다가 곧 성균관 전적으로 이조좌랑에 피천되니 이때에 훌륭한 인물들이 많았다.
김홍도와 오로지 격탁양청(激濁揚淸)함을 주장하니 권간배의 꺼리는 바가 되어 한을 머금고 화를 전가시키니 일시의 명류들이 혹은 귀 양가고 혹은 파직당하였다. 서울을 떠나 연산에 은거하였고 1563년(명종 22) 조정의 조치가 달라져서 벼슬을 돌려주고 다시 등용한다는 명이 내렸으나 마침 아버지의 상중이라 이듬해 복제를 마치고 곧 승문원 교리, 예조정랑, 성균관 직강, 이조정랑에 제수되었고 이로부터 여러 시(寺)의 첨정을 한 번, 정(正)을 세 번 지냈고 양사의 사간과 집의며 의정부로는 검상과 사인이요 관직(官職)으로는 응교, 전한, 직제학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