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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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문화재 자료

(20) 김집 선생 묘 (金集 先生 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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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6호 (논산시) | 위치 : 충청남도 논산시 벌곡면 양산리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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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인조 14) 5월에 사헌부 장령, 6월에 종친부 전첨, 7월에 집의(執義), 8월에 용양위 부호군, 10월에 군자감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치 않았다. 이해 12월에 병자호란이 발발했고 1637년(인조 15) 적이 물러간 후 도성에 들어가 임금께 위안을 드리고 돌아왔다.

 

이듬해 8월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고 1639년(인조 17) 다시 집의에 제수되어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사은한 바 5월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에 경연참찬관을 겸하라 하므로 수차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여 사은하고 경연에 입시하였다. 이어 우부승지에 임명하니 또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6월에 호군으로 바꾸어 연산으로 돌아온 바 7월 12월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출사치 않았으며 다시 우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643년 (인조 21) 의례문해(疑禮問解)를 교정하고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이듬해 8월 에 공조참의(工曹參議), 10월에 좌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1645년(인조 23) 10월에 동궁을 보좌하라는 논지가 있자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고 11월에 사양하는 글을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고 이듬해 세 번째 사직의 글을 올렸다. 1647년(인조 25) 세자시강원 찬선에 제수 되었으나 글을 올리고 출 사치 않았다.

 

이듬해 특명으로 세자시강원 찬선으로 부름을 받았고 11월에 사직을 간청하여 허락을 얻고 12월에 부친이 저술한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다시 간행했다. 1649년(인조 27) 정월, 공조참의에 임명되 었으나 사양하였는데 5월에 인조가 승하하고 세자 효종이 즉위하자 특명으로 부름을 받아 6월에 상경하니 왕이 식량을 하사하고 가선대부 예조참판(禮曹參判)에 특별히 임명되어 네차례 사양하여 뜻을 얻었으나 바로 공조참판에 제수되니 또 사양하는 글과 함께 상례이동(喪禮異同)과 시무 7조를 올리니 왕이 탄복하여 그 소장을 옆에 두었다.

 

명을 받아 소학의 주(註)와 중용의 구두(句讀)를 교정했다. 7월과 9월에 대사 헌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고 사양했다. 9월에 왕이 의식을 내리고 공조참판을 제수하였고 10월에 상소했 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경연에 참가하여 중용을 강술하고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대해 왕에게 말씀드렸다. 11월에 귀향을 간청하니 대신, 홍문관, 성균관생들까지 글을 올려 머물도록 청원하였으나 뜻을 굽히지 않자 승지 익희(益熙: 조카)로 하여금 설득하여 왕명에 따르게 하였다. 대사헌,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세 번 상소, 세 번 대면해서 말씀드리고 사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