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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시·도 지정 문화재 (기념물)
(1) 김만기 묘역(金萬基 墓域) |
경기도 시도기념물 제131호 (군포시) | 위치 : 경기도 군포시 대야미동 산1-12
김만기(인조11년 1633∼숙종13년 1687), 55歲, 조선중기의 문신, 자는 영숙(永淑), 호는 서석(瑞石)이 다. 형조참판을 지낸 장생(長生)의 증손이고, 아버지는 충정공(忠貞公) 익겸(益兼) 이며, 어머지는 증정경 부인 해평윤씨로 참판 지의 딸이다.
숙종의 국구(國舅:즉 숙종대왕 원비 인경왕후의 아버지)이며, 숙부 익희(益熙)에게서 수학하였으며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효종 4년(1652)에 생진양시에 장원하고, 이듬해 별시 문과에 을과 3인으로 급제하여, 1666(현종 8) 전 라도관찰사로 임명되었으나 편모를 떠나 멀리 갈 수 없다고 사양하니 대사간이 되고, 곧 좌승지로 옮겼다. 양관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에 동지의금부사를 겸임했다.
이듬해 병조판서에 지춘추관사를 겸했고, 1674년(현종 16) 예조판서로 옮겨 정헌대부로 승진되고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국구(國舅)로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승진되고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고 도총관, 호위대장, 전생서 제조 및 총융사(摠戎使)를 겸함으로써 병권을 장악하여 남인(南人)인 윤휴, 허적의 질시를 받았고,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대제학이 되었다. 숙종 7년(1680) 경신환국이 일어났을 때 훈련대장(訓鍊大將)으로서 끝까지 굽히지 않고 남인과 맞섰으며 강만철(姜萬鐵) 등이 허적의 서자 견(堅)과 종실인 복창군(福昌君),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하자, 이를 다스려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숙종 13년(1686년) 풍정도감(豊呈都監) 도제조를 지냈다.
효종(孝宗)이 승하한 뒤로 국세가 쇠약해지고 국방력이 차츰 무너지므로 벼슬을 버리고 정양할 뜻이 있었으나 갑자기 국구가 되어 거취가 양난할 뿐 아니라 위기를 당하여 형세가 급박하고 사화가 잇따르니 충성과 지혜를 다하여 종사를 편안하게 하고 훈업을 이룬 뒤 벼슬을 헌신같이 버리고 일 없는 듯이 자처하려 했으나 국가에서는 주석같이 의지하고 선비들은 산같이 우러렀다.
경서 사기 외에도 제가서에도 달통하였으며,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며, 부조(不祧)의 은전을 받았다. 시문(時文) 16권과 문집 서석집(瑞石集)이 있으며, 광산김씨 족보를 처음으로 편간하니 서석보(瑞石譜)라 이르다.
1719년(숙종 46) 현종(顯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배는 서원부부인 청주한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