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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기타 문화재 자료
(18) 종계시첩 (宗稧詩帖) |
위 종회시첩(宗會詩帖)은 세로가 72.5㎝이고 가로가 38㎝크기의 25장으로 된 서첩인데, 명종2면(1547) 음력 8월 16일에 서울 정동(貞洞)에 살고있던 황강(黃岡:金繼輝 1526~1582)선생을 찾아간 후조당(後彫堂:金富弼 1516~1577) 형제와 그 외의 일가 여럿이 모여 목족을 다지는 종회를 열었는데, 이 종회가 정동에서 열렸다 하여 일명 정동계회(貞洞會)라고도 하고, 이 모임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이 나라 종회의 효시(嚆矢)가 된다.
그때 황강이 시서를 쓰고 지은 근체시(近體詩)인네 내용인즉
『붉은 잎 노란 꽃으로 왼 산을 물 들였는데 / 서풍은 솔솔 불어 작은 시름까지 없애 주준 구나 7년 만에 만난 회포 풀어보고자 / 3년 상내 쌓인 슬픔도 잊기 위하여 파는 갈렸지만 한 몸에서 나온 형제이며 / 가지는 달라도 뿌리가 같은 나와 자네일세 은근한 이 정 잊지 않고 서로 좋게 지내면 / 저 멀리 후손에게까지 미쳐가지 않으리』
그리고 175년 뒤인 경종2년(1722) 2월에 황강의 5대손인 온재(齋 : 金鎭玉 1659~1736)가 안동부사로 도임하여 그 곳 후조당종가(後彫堂宗家:당시 종손 金岱1665~1747)에서 보관하고 있던 앞에 글을 발견하 고 너무나 감격하여 모사하고, 서악사(西嶽寺)에서 종회를 열고 화답하는 시를 지어 적은 것이다.
『종회를 열었던 그 당년에 받은 향기를 / 전해오던 소축(小軸)이 병화를 면하였구나
서륜수계(敍倫修)하는 것은 혼연 어제와 같으니 / 술 마셔 취한 얼굴 대하여 보세 유묵은 뚜렷하여 우리 선조임을 밝혀주고 / 두터운 정 또 다시 우리를 힘쓰게 하네 여러 본으로 모사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 서로 나눠 태백 후손들도 간직하기 바라노라』
그로부터 또 40년 뒤인 영조38년(1762) 8월에 온재의 손자 상성(相聖)이 의성현령으로 부임하여 속 서악종회를 열었을 때 안동종인 종구(宗九:致祥씨의 손자)씨가 위의 서첩을 보여주니,
이것은 나의 조부님이 황강선조의 시와 조부당신의 시를 손수 쓰신 것이니 소동파의 족보 서문을 보는 것처럼 반가운 일이니 더욱 애호하고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게 보관하라는
발문(跋文)을 마지막에 적은 서첩으로, 사진에서 “엽적화황(葉赤花黃)”은 황강시의 첫 구절이고, “태백(太白)은 온재의 화답시 중 끝부분으로 보물급에 속하는 귀중한 서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