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 등과실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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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려조 문과 급제(高麗朝 文科 及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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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기

① 고려의 과거제도

고려의 과거제가 처음 실시된 것은 956년(광종 9) 중국 후주인(後周人) 쌍기(雙冀)의 건의에 의한 것이다. 광종은 호족 세력을 약화 시키고 왕권을 강화해가는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과거제를 채택하였다. 중국의 후주는 무장 출신이 황제가 되던 시기에 문신인 곽위 (郭威)를 황제로 추대하고,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 정치를 수행하였다.

 

고려 광종 역시 무인 출신인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기 때문에 후주의 개혁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후 주의 개혁 정치를 본보기로 삼아 노비안검법과 광군(光軍) 설치 그리고 과거제를 실시하였다.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는 광종의 개혁 정 치를 도와 수행한 주요 인물로 956년(광종 9)·958년(광종 11)·959년(광종 12) 3차례나 시관인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과거제를 통한 신진 관료의 진출에 대해 공신 출신 호족들의 심한 반발에 부딪힌 광종은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통해 호족 세력을 정 리하고, 신라 6두품 계열·후백제 계통·발해 계통 인물 등 신진 관료를 등용하였다.

 

광종 개혁 정치의 성공으로 성종대에는 교육과 과거제가 유기적으로 발전되어 갔다. 성종은 개경에 국자감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경학박사를 파견하여 지방의 향리 자제를 교육시켰다. 특히 지방에 파견된 경학박사는 자신이 가르친 이들의 과거 합격이 주요 임무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국가에서는 교육과 과거제를 유기적으로 활용하여 중앙의 관인 자제뿐만 아니라 지방의 향리 자 제를 관료화하려고 하였다.

 

성종대 과거 출신 관료가 주요 관직에 진출하자 점차 과거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갔다. 이처럼 과거가 관료 선발의 주요 통로로 자 리 잡게 되면서 과거제에 대한 제도적 정비도 이루어졌다. 1024년(현종 15) 현종은 지방의 과거 응시생들에 대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 하였다.

 

지방의 과거 응시생(鄕貢이라 일컬음)은 우선 지방관인 계수관이 주관하는 계수관시에 합격해야 했다. 계수관시의 합격 인원은 주 현(州縣)의 규모에 따라 달랐다. 계수관시의 합격 정원은 1000정(丁) 이상의 주현에서는 3명, 500정(丁) 이상의 주현에서는 2명, 그이 하 주현에서는 1명이었다.

 

이것은 고려 초기 지방의 호족들에 의해 추천된 이들(향공이라고 함)이 개경에 와서 과거에 응시하던 것을 체계화한 것이다. 즉 지방의 토호 세력인 호족들이 추천하던 것을 그 권한을 계수관에게 주되, 객관적으로 추천할 수 있도록 시험제도 를 도입하였다. 계수관은 시험에서 선발된 이들을 추천하고, 이들이 개경의 과거 시험에 응시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계수관이 과 거 응시에 합당치 못한 인물을 선발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국자감시를 주관하는 국자감에서 계수관을 조사하여 처벌할 수 있었다.

 

1110년(예종 5)에 서경의 경우에는 유수관이 시험을 실시하여 국가감시에 응시할 대상자를 선발하게 하는 유수관시가 따로 실시 되었다.계수관시·유수관시를 합격한 이들은 개경의 국자감에서 다시 시험을 치러야 했다. 국자감에서 치룬 국자감시에 합격해야 예부에 서 주관하는 본시험에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계수관시·유수관시의 설행은 첫째 관료가 되려는 지방의 과거 응시생에게 부담을 줌 으로써 지방 세력을 약화시키려 한 것이다. 둘째 국자감이 지방에서 과거를 시행하는 계수관을 통제하게 하여 중앙교육기관의 권한 을 확대하여 과거 실시를 체계화하려 한 것이다.

 

계수관시나 유수관시와 유사한 성격을 가진 개경시가 고려 후기에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개경시는 개경 거주자에게 응시 자격이 주어지는 시험이다. 개경 거주자란 국학생이나 십이도생(十二徒生)을 제외한 이들로서 과거에 응시하려는 이들을 말한다. 개경시에 응시하는 이들은 주로 관직자들이 많았다.

 

1031년(덕종 즉위년)에 본시험인 예부시에 앞서 예비 시험인 국자감시를 설행하였다. 1031년 설치된 국자감시는 현종대에 지방의 과거 응시생이 계수관시를 거쳐 국자감에서 시행한 시험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덕종이 설치한 국자감시는 지방의 응시생만을 대상 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개경의 응시생들도 그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개경의 응시생이란 국학생, 사립학교 학생인 십이도생(十二徒生) 등이다. 덕종이 설치한 예비 시험은 국자감시는 본시험인 예부시를 응시하고자 하는 원하는 이들이 시험을 치렀다. 따라서 덕종대부 터는 과거 시험이 예비 시험과 본시험이라는 이중적인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국자감 시험은 3품 이하의 관원이 시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국자감시의 합격 정원은 제한이 없었다「.고려사」선거지에 의하면 적게는 39명에서 많게는 100명 이상이 선발되었다. 국자감시에 합격한 이들은 국자감에서 수학하였다. 이들이 국자감에서 3년을 수학 하여야 본 시험인 예부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본시험인 예부시는 고려 과거의 근간을 이루는 시험이다. 예비 시험이 시행되기 전에는 예부에서 치루는 이 시험으로 과거 합격자 가 결정되었다. 예부시는 1회 혹은 2회의 시험을 통해서 합격자를 결정하였다. 2회의 시험을 치렀다는 것은 복시(覆試)의 설행을 의미한다. 覆試는 인종 초기에 폐지되기 전까지 간헐적으로 시행되었다. 복시를 시행한 왕은 성종·현종·문종· 종·숙종·예종이었 지만, 복시 시행 횟수가 과거 시행 횟수와 일치되지는 않았다. 즉 복시를 시행한 왕들도 과거를 시행할 때마다 복시를 치룬 것은 아니 라는 것이다.

 

복시는 시관인 지공거가 주관하여 과거 합격자를 배출한 이후 왕이 개입하여 시험을 행하여 합격자를 선발하는 것을 말하는데, 시 행 절차나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1116년(예종 11) 예종이 복시를 시행하였는데, 지공거와 동지공거가 선발한 과거 합격 자와 그 이외의 인원을 더 모아 복시를 시행하고 급제 증서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과거 합격자와 이외의 인원을 더 모아 시험하였다고 한다. 복시가 항상 과거 급제자와 그 이외의 사람을 대상으로 치렀는지 확인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관인 지공 거가 선발한 합격자를 왕이 복시를 통해서 다시 선발한다는 것은 지공거의 독단을 막고, 왕의 권위를 행사한 것이다. 복시가 인종대에 폐지된 후 다시 시행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후기 충렬왕대에 와서이다.

 

예부시의 정원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광종대에서 성종대에 이르는 시기에는 10명 이내의 합격자가 배출되고, 그 이후에는 10명 이상의 합격자가 배출되었다. 고려 후기에 들어 신종대 이후로 을과 3명, 병과 7명, 동진사 23명 등 33명의 합격자가 배출되기 시작 하였으나, 정착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것이 1288년(충렬왕 14) 이후로는 몇 번의 예외도 있으나, 규칙적으로 33명의 합격자를 배출 하였다.

 

고려의 과거제는 고려 후기에 크게 개혁되었다. 무신 정권이 무너지고 왕정으로 회복되자, 문신들은 학교제도와 과거제도를 재정 비하였다. 주자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 계층에서는 국학을 진흥시키는데 주력하여 국자감을 성균관으로 개칭하여 중건하였다. 성균 관에서는 오경과 주례로 육재(六齋)를 구성하였던 것을 사서와 오경으로 구재(九齋)로 바꾸었다.

 

이것은 사장(詞章) 중심의 교육에서 경전 중심 교육으로 전환된 것을 의미한다. 성균관에서는 교수법에도 개혁이 진행되어 경서를 전공별로 나누어 강의와 토론을 병행하였다. 이처럼 교육제도와 학풍이 새로워지자 그 영향이 과거제에도 미치게 되었다. 시험 과목이 시부(詩賦)에서 경학(經學)으로 바뀌게 되었고, 시험 제도에 있어서도 원의 과거제에 따라 삼층법이 시행되었다

 

과거 삼층법은 1369년(공민왕 18)에 처음 시행되었는데, 향시·회시·전시의 삼단계의 시험을 치루는 것이다. 지방에서 향시에 응 시하여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회시가 치러졌다. 회시 합격자는 최종적으로 전시를 치르는데, 전시는 왕이 시험을 주관하였다. 과거 삼 층법은 시관인 지공거가 과거를 주관하던 것을 왕이 과거에 개입함으로써, 지공거의 영향력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고려에는 지공거를 좌주(座主)로 삼고, 그 해 지공거에 의해서 선발된 합격자를 문생(門生)이라 하는 좌주문생제가 발전하였다. 좌주문생는 과거의 문 벌을 형성하는 폐단을 초래하였다. 왕들은 좌주문생제를 약화시키기 위하여 친시(親試)를 시행하여 스스로 좌주를 자처하기도 하였 다. 그러나 친시는 간헐적으로 이루어졌고, 제도화되지 못하였다. 그러던 것이 삼층법이 시행됨으로써 전시를 통해서 왕이 최종 합격자를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창왕이 즉위한 해인 1388년에는 시관에 대한 변화가 있었다. 시관은 대체로 지공거와 동지공거 2명으로 구성되어 있던 것을 8명 으로 늘렸다. 8명의 시관은 회시 시관(지공거)과 전시 시관으로 나뉘었는데, 이러한 조처는 좌주의 권한을 분산시키려 한 것이다. 고려 초기 시관의 중임이 이루어지면서 문벌과 학벌을 형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시관인 좌주와 시관이 선발한 합격자 문생 사이에는 부자 관계와 같은 긴밀한 유대가 이루어졌다. 과거 합격자가 발표된 이후 좌주가 문생들과 함께 며칠 동안 연회를 베풀었다.

 

창왕 즉위년에 시관의 수를 증원시킴으로써 좌주와 문생이 함께하는 연회 역시 없었을 것이며, 이것은 좌주와 문생간의 강한 유대 의식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고려 말기 주자학을 수용한 이후 관학이 쇄신되고, 과거제의 폐단을 줄이는 개혁은 조선의 과거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② 과거시험 절차

고려 초기 과거 시험은 규칙적으로 시행되지 않았다. 1084년(선종 원년)에 3년에 1회씩 설행한다고 정하였으나, 이것은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고려사』선거지에 의하면, 과거가 매년 혹은 2~3년 간격으로 설행되고 있다.

 

고려 초기에는 과거 시험이 주로 3월에 실시되고, 가을이나 겨울에 합격자를 발표하여 응시자들이 합격 여부를 확인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1004년(목종 7)에는 과거법을 수정하였다. 명경업과 잡업은 제술업이 설행되기 전해 겨울 11월에 시험이 설행되었고, 제술업은 3월에 시험을 설행하였다. 제술업 시험 설행 후 10일 만에 등급을 정하여 합격자를 발표하였는데, 이때 명경업과 잡업의 합 격자도 같이 발표하였다. 그렇다면 과거 응시자가 시험을 치르는 절차는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시험 절차에 관한 자세한 자료는 없으나『고려사』선거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응시자는 행권(行卷)과 가장(家狀)을 시험관리소인 공원(貢院)에 제출해야 한다. 행권은 응시자 이름, 생년, 사조(四祖: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를 적은 원서이며, 가장은 행권에 적은 세계(世系)를 증명하는 증빙서류이다. 행권과 가장은 제술업의 경우 12월 20 일까지, 명경업· 잡업은 11월을 기한으로 제출되어야 했다. 다만 관직자나 부모의 상이 시험기일 직전에 끝난 경우에는 서류를 접수 하는 기일이 지나더라도 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 부모상을 당한 경우에는 27개월이 지나야 응시가 가능하였다. 부모상의 기한 에 대한 검토는 중앙은 부(部)· 방(坊)· 리(里)의 책임자, 지방은 그 고장 기인(其人)이나 사심관(事審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응시자들은 시험지를 시험이 설행되기 며칠 전에 공원에 제출해야 한다. 시험지에는 첫머리에 이름, 본관, 사조(四祖)를 기록하고, 그 부분을 풀로 봉하여 제출하여야 한다. 이것은 시관이 시험 등급을 공정하게 매기게 하기 위한 것이다. 시관인 지공거는 문하부와 말직사에서, 동지공거는 경(卿)· 감(監)이 선출한다. 선출된 시관은 시험 전날 오후에 초장· 중장· 종장의 시험을 적어서 왕에게 올 리면, 왕이 시험 문제를 낙점하여 정하였다. 시관은 왕이 낙점한 시험 문제를 공원에 가져가 시험 당일 내걸게 된다.

 

시험 당일 왕의 비서인 승선(承宣)이 어보를 가져오는데, 이 어보는 시험지에 도장을 찍는데 사용되었다. 시험이 끝난 후 시관이 등 급을 매기면 승선이 발표하는데, 발표 절차의 초장과 중장은 같다. 최종 시험인 종장의 합격자는 시관이 등급을 매겨 왕에게 바치면, 왕이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최종 합격자가 발표되면, 합격자들은 시관인 좌주를 찾아가 예를 행하고, 좌주는 이들을 자기 집에서 맞아 연회를 베풀었다. 또한 최종 합격자에게는 홍패가 하사되었다.

 

홍패는 원칙적으로 사령이 합격자의 집에 가서 하사하였다. 사령이 홍패를 가져오면, 합격자의 집에서는 사령을 대접하는 행사가 있었다. 홍패를 하사하는 사령을 대접 하는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궁궐에서 직접 홍패를 하사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홍패 를 합격자의 집에 가서 하사하는 것은 합격자 본인뿐만 아니라 그 동리에도 영광스럽게 하여 학업을 닦고자 하는 의욕을 북돋을 수 있다는 점을 들어서 계속 합격자의 집에 홍패사령이 파견되었다

 

과거 합격자 명단을 계적(桂籍)이라고 하고, 같은 해 과거 합격자 명단을 모아놓은 것을『동년록』이라 한다『.동년록』은 국가에서 만들어서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국가에서 동년록을 모아서 정리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현존하는 고려시대『동년록』은 극히 적다.

 

현존하는『동년록』은 조선시대『국조문과방목』의 부록으로‘전조과거사적(前朝科擧事績)’이란 이름으로 붙어 있는데, 고려 후기 동년록 일부만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 이외에도『고려열조등과록』『,해동방목』이 있다.

 

『전조과거사적』에는 동년록이 16개가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동년록』은 1290년(충렬왕 16)방, 1360년(공민왕 9)방, 1362년(공민왕 11)방, 1368년(공민왕 17) 송산친시방, 1369년(공민왕 18)방, 1371년(공민왕 20)방, 1374년(공민왕 23)방, 1376년(우왕 2)방, 1377년(우왕 3)방, 1380년(우왕 6)방, 1382년(우왕 8)방, 1383 년(우왕 9)방, 1385년(우왕 11)방, 1388년(우왕 14)방, 1389년(공양왕 1)방, 1390년(공양왕 2)방등 16개이다.

동년록의 수록 내용은 전력, 이름, 생년, 본관 그리고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의 직역과 이름이다. 외조부의 경우에는 직역과 이름 이외에 본관까지도 기재되어 있다.

<출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金篤

   참고자료: 高麗列朝登科錄 》(미국 하버드 옌칭도서관 소장)

* 金貽永

   참고자료: 高麗史/ 鄭沆墓誌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