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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8)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 |
연번 |
세(世) |
휘자(諱字) |
관(官) |
시대(時代) |
아호(雅號) |
1 |
29世 |
익희(益熙) |
이조판서(吏曹判書) |
조선조 효종(孝宗) |
창주(滄洲) |
2 |
30世 |
만기(萬基) |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
조선조 현종(顯宗) |
서석(瑞石) |
3 |
30世 |
만중(萬重) |
예조판서(禮曹判書) |
조선조 숙종(肅宗) |
서포(西浦) |
4 |
31世 |
진규(鎭圭) |
예조판서(禮曺判書) |
조선조 숙종(肅宗) |
죽천(竹泉) |
5 |
32世 |
양택(陽澤) |
영의정(領議政) |
조선조 영조(英祖) |
건암(健庵) |
6 |
36世 |
상현(尙鉉) |
이조판서(吏曹判書) |
조선조 고종(高宗) |
경대(經臺) |
7 |
37世 |
영수(永壽) |
이조판서(吏曹判書) |
조선조 고종(高宗) |
하정(荷亭) |
편집자 주
대제학(大提學)
① 대제학(大提學)을 문형(文衡)이라고도 한다. 문형(文衡)은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나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임해야만 한다. 대제학(大提學)은 정2품의 관계(官階)이지만 학문(學文)과 도덕(道德)이 뛰어나고 가문(家門)에도 하자가 없는 석학(碩學) 석유(碩儒)만이 오를 수 있는 지위(地位)인데, 학자(學者)와 인격자(人格者)로서의 최고지위(最高地位)라고 할 수 있어 본인(本人)은 물론(勿論) 일문(一門)의 큰 명예(名譽)로 여겼다.
대제학 후보선정(大提學候補選定)은 전임(前任) 대제학(大提學)이 후보자(候補者)를 천거하면 이를 삼정승(三政丞) 좌.우찬성(左右贊成), 좌.우참찬(左右參贊), 육조판서(六曹判書),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등이 모여 다수결(多數決)로 정한다. 대제학(大提學)은 본인(本人)이 사임(辭任)하지 않는 한 종신직(終身職)이다.
② 문형(文衡) : 문과(文科)를 거친 문신(文臣)이라도 반드시 호당(湖堂)출신이라야만 [문형(文衡)]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문형(文衡)은 이들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성균관(成均館) 삼관(三館)의 최고 책임자로서 관학계(官學界)를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직(職)이므로 더할 수 없는 명예로 여겼고, 품계(品階)는 비록 판서급(判書級)인 정2품(正二品)이었지만 명예로는 삼공(三公(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이나 육조판서(六曹判書)보다 윗길로 쳤다.
역사상 여러 벼슬에서 최연소(最年少)기록을 세운 이는 한음 이덕형(漢陰李德馨)인데, 그는 20세에 文科(문과)에 올라 23세에 호당(湖堂)에 들었고 31세에 문형(文衡)이 되었으며, 38세에 벌써 우의정(右議政)이 되어 42세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③ 고려시대에도 태현(台鉉), 광재(光載), 진(稹), 한로(漢老) 4분이 있으나 예문관 또는 수문관 대제학을 지냈을 뿐 양관 대제학이 아님으로 제외하였다.
④ 3대 대제학
: 김만기, 김진규, 김양택
형제 대제학
: 김만기, 김만중
⑤ 우리 광산김씨의 문형(文衡)을 8명으로 헤아린 예도 있었으나, 이는 영조 때 신임사화(辛壬士禍) 관련으로 삭탈 관직된 諱 일경(一鏡)을 포함시켰기 때문인데, 諱 일경(一鏡)은 사계의 증조대에서 계파가 갈라진 諱 익렴(益廉)의 손으로 호는 아계(丫溪)이며 숙종조에 문과하여 양관대제학에 이르렀고, 영조조 신임사화(辛壬士禍) 후 복주(伏誅)되었다가 순종 정미(1907)에 신원(伸寃)되나 기록과는 달리 호 아계(丫溪) 휘 일경(一鏡)은 문형이 아니었던 것으로 고증되기도 하기에 정확한 기록이 발견되기까지는 7명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