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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7) 상신(相臣) |
연번 |
세(世) |
휘(諱) |
봉작(封爵) |
비고(備考) |
1 |
15世 |
심(深) |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 |
고려사(高麗史) |
2 |
15世 |
도(瑫) |
광산군(光山君) |
고려사(高麗史) |
3 |
16世 |
광철(光轍) |
화평군(化平君) |
김광철묘지명(金光轍墓誌銘) |
4 |
16世 |
석견(石堅) |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 |
고려사(高麗史) |
5 |
16世 |
승진(承晋) |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
씨족원류(氏族源流) |
6 |
16世 |
인연(仁沇) |
광산군(光山君) |
고려사(高麗史) |
7 |
16世 |
인연(仁衍) |
광산군(光山君) |
고려사(高麗史) |
8 |
17世 |
회조(懷祖) |
해양군(海陽君) |
씨족원류(氏族源流) |
9 |
17世 |
수(粹) |
해양군(海陽君) |
|
10 |
17世 |
서남(瑞南) |
광산군(光山君) |
|
11 |
18世 |
정(鼎) |
광성군(光城君) |
여지도서, 호남읍지 |
12 |
18世 |
계지(繼志) |
광성군(光城君) |
|
13 |
19世 |
약항(若恒) |
광산군(光山君) |
고려사(高麗史) |
14 |
19世 |
재(滓) |
광산군(光山君) |
|
15 |
20世 |
혁(革) |
광성군(光城君) |
|
16 |
20世 |
맹권(孟權) |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
|
17 |
20世 |
을상(乙祥) |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
|
18 |
20世 |
자빈(子贇) |
광산군(光山君) |
고려사(高麗史) |
19 |
21世 |
한로(漢老) |
광산군(光山君) |
고려사(高麗史) |
20 |
21世 |
철산(鐵山) |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중종실록(中宗實錄) |
21 |
21世 |
백겸(伯謙) |
광원군(光原君)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22 |
21世 |
극성(克成) |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
중종실록(中宗實錄) |
23 |
22世 |
국광(國光) |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
세조실록(世祖實錄) |
24 |
22世 |
겸광(謙光) |
광성군(光城君) |
성종실록(成宗實錄) |
25 |
22世 |
면(沔) |
광주군(光州君) |
전고대방(典故大方)<청선고(淸選考)>는 光州君 |
26 |
23世 |
극뉴(克忸) |
광원군(光原君) |
|
27 |
23世 |
여석(礪石) |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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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23世 |
극핍(克愊) |
광악군(光嶽君) |
|
29 |
23世 |
태흘(台屹) |
한평군(漢平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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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24世 |
명윤(明胤) |
광평군(光平君) |
명종실록(明宗實錄) |
31 |
25世 |
인경(仁慶) |
광천위(光川尉) |
중종실록(中宗實錄) |
32 |
25世 |
태주(泰柱) |
해평군(海平君) |
|
33 |
26世 |
억성(億成) |
광무군(光茂君) |
|
34 |
26世 |
소(昭) |
광림군(光林君) |
|
35 |
29世 |
익겸(益兼) |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 |
인조실록(仁祖實錄) |
36 |
29世 |
익훈(益勳) |
광남군(光南君) |
숙종실록(肅宗實錄) |
37 |
30世 |
만기(萬基) |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
숙종실록(肅宗實錄) |
38 |
31世 |
진구(鎭龜) |
광은군(光恩君) |
숙종실록(肅宗實錄) |
39 |
33世 |
춘택(春澤) |
광녕군(光寧君) |
|
40 |
34世 |
두추(斗秋) |
광안군(光安君) |
|
41 |
34世 |
기성(箕性) |
광은부위(光恩副尉) |
영조실록(英祖實錄), 初名 두성(斗性) |
42 |
- |
휘남(輝南) |
화평군(化平君) |
|
43 |
- |
희(禧) |
화평군(化平君) |
李彦冲 墓誌銘(고려조) |
편집자 주
① 상신(相臣) : 관(官), 학계(學界)를 공식적으로 대표하며, 고려의 삼사(三師), 삼공(三公)과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삼사사(判三司事), 삼중대광(三重大匡), 개부의동사(開府儀同司), 중서령(中署令), 상서령(尙署令)과 조선의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 및 정일품(正一品)의 신하를 말한다.
② 각간(角干) : 신라 때의 최고 관위(官位). 이벌찬(伊伐飡)·이벌간(伊伐干)·우벌찬(于伐飡)·각찬(角粲) 등 다른 이름이 많으며, 처음에는 주다(酒多)라 하였다. 진골(眞骨)만이 하는 벼슬로, 신라 17관등제(官等制)와는 별도로 제정되었다.
③ 고려시대의 문하시중(門下侍中)은 수상(首相) 격이다.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장관으로 종1품으로 정원은 1인이었다. 고려 성종 원년(982) 이전의 내의성(內議省)을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으로 개편하면서 처음 설치됐다.
고려 성종 때 삼성·육부(三省·六部)의 관제가 확립되자,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의 최고 관리로서 내사령과 함께 문하시중을 두었던 것인데 1356년(공민왕 관제의 전면적 복구에 따라 문하시중으로 다시 복구, 1261년(문종 15)의 관제개혁으로 개칭되어 문하시랑(門下侍郞)이 되었다. 충렬왕 원년(1257)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병합되어 첨의부(僉議府)로 되면서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바뀌고,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바꾸었다.
1275년(충렬왕 1) 중서문하성과 상서성(尙書省)을 병합하여 첨의부(僉議府)로 고쳤으므로 중서령은 폐지되고 문하시중 대신 좌첨의중찬(左僉議中贊)·우첨의중찬(右僉議中贊)을 두었다. 1298년(충렬왕 24)에는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부른 적이 있으나 곧 중찬으로 복구, 1308년(충렬왕 34) 첨의부가 도첨의부(都僉議府)로 됨에 따라 정승(政丞)이라고 불렀다.
고려 충숙왕 17년(1330) 충혜왕이 즉위하여 다시 중찬으로 복귀하였으나 얼마 뒤 정승으로 고치고, 공민왕 3년(1354)에 도첨의시중으로 바뀌었다가 곧 도첨의정승으로 되었으며, 반원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다시 문하시중으로 불리게 되었다.
1362년(공민왕 11)에 중서문하성이 도첨의부로 바뀌게 되자 다시 첨의좌정승·첨의우정승으로 분리, 1369년(공민왕 18) 도첨의부가 문하부로 고쳐지자 문하좌시중·문하우시중으로 불려왔으며, 창왕(昌王) 때는 시중(侍中)으로 불렀다. 창왕 때 상좌(尙左)의 원칙에 따라 좌시중은 문하시중으로, 우시중은 수문하시중으로(守門下侍中)으로 각각 바뀌었다.
④ 고려 시대의 평장사는 조선 시대의 3정승에 해당하는 1품 벼슬인 문하시중(門下侍中), 중서령(中書令), 상서령(尙書令) 등의 바로 다음 자리인 정이품(正二品) 관직으로 국가의 학문(學問)을 총괄하는 벼슬로 상신(相臣) 급으로 보며,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등으로 일컬어졌고, 후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 상서(尙書), 전서(典書), 판서(判書)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