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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무과 급제(武科 及第) |
편집자 주)
① 무과방목은 801회의 무과시험 중 138회분(17.3%)만 현전하고 있다.
무과방목은 다른 과거시험의 방목에 비해 남아있는 분량이 적을 뿐만 아니라 그 분량마저 전체 실행 횟수의 20%에도 채 미치지 못하고 있다.
② 무과의 종류
조선시대에 무과가 처음으로 실시된 시기는 1402년(태종2)이었다. 문과는 이보다 앞서1393년(태조2)부터 시행되었다. 1402년에 무과가 시행된 이후부터 문과와 무과는 ‘대거(對擧)’라 하여 한쪽을 시행하면 다른 쪽도 반드시 함께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 무과는 1402년 이후부터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가 폐지될 때까지 총 801회 시행되었다.
무과는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식년시(式年試)와 부정기적으로 시행하는 각종 별시(별시)가 있다. 식년시는 3년 마다 자(子)·오(午)·묘(卯)· 유(酉)가 들어가는 해에 실시하는 시험이다. 별시는 증광시를 비롯해 별시·외방별시·정시·외방정시·알성시·춘당대시·중시·도과·등준시·진현시·발영시·탁영시·구현과·충량과 등이 있다.
증광시는 국가나 왕실에 경사가 있을 때 시행했는데 식년시와 몇 가지 측면에서 유사한 점이 있었다. 첫째, 선발 정원이 식년시와 같으며, 대증광시(大增廣試)에만 식년시의 두 배를 뽑도록 하였다. 둘째, 식년시와 마찬가지로 삼장(三場)으로 운영되었다. 셋째, 선조대 이후로 증광시의 실시 이유가 다양해지지만 왕의 즉위 등 식년시와 마찬가지로 실시시기를 예측할 수 있는 시험이었다. 넷째, 증광시는 식년시처럼 문과·무과·생원진사시·잡과 모두 공통으로 시행한 시험이었다. 반면 각종 별시는 문과·무과에만 있었다.
정시는 1489년(성종20)에 처음 시작될 때에는 봄·가을로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시험을 보여 우수한 사람에게 직부전시의 자격을 내리는 시험이었다. 이것이 1583년(선조16)부터 독자적인 과거시험으로 승격되었고, 무과는《국조방목》에 중종 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한다. 정시는 증광시를 설행할 만한 큰 경사는 아니지만 국가나 왕실에 경축할 만한 일이 있을 때에 관례적으로 실시한 것으로 판단된다.
알성시는 국왕이 문묘를 참배한 후에 시행한 시험이며, 외방별시·외방정시·도과는 지방민을 위열하기 위해 특별히 실시한 시험이다. 중시는 10년에 한 번씩 당하관 이하 관리의 승진을 위해 실시한 시험이며, 등준시·진현시·발영시·탁영시·구현과도 중시와 성격이 비슷하다.
③ 시험 과목
무과는 기본적으로 초시, 복시, 전시를 거치는 삼장제(三場制)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식년시와 증광시를 제외한 각종 별시에서는 한번 시험으로 당락을 결정하는 단시제(單試制)나 강경이 있는 복시(覆試)를 생략하고 초시와 전시만으로 행해지는 경우도 빈번하였다.
④ 응시 자격
『경국대전』에 의하면 무과는 문과와 마찬가지로 당하관 이하만 응시할 수 있었다. 《경국대전》의 조항은 관리들의 응시 자격을 제한했을 뿐이지 과거 응시자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므로 조선전기 무과의 실제적인 응시자격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조금씩 견해를 달리한다.
먼저 문과와 달리 제한이 없어서 천인이 아닌 모든 계층이 응시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대표적이다. 반면, 훈련관(訓練館)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양반자제를 주축으로 한 사족층, 관인층인 성중관(成衆官), 의흥친군위의 친군(親軍)·삼군갑사(三軍甲士) 등의 금군(禁軍)에 포함된 일부 상층 양인, 무직사관(無職事官)인 한량(閑良) 등 말과 하인을 데리고 무예를 익힐 수 있는 사족층을 주된 응시층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최근 태종~성종연간 무과급제자 336명을 분석한 결과 상당수가 급제 당시 이미 관직 또는 품계를 받았거나 양반 특수 정예 군소속으로서 사족이 많으며, 이들의 아버지 역시 문반관료 혹은 학자성향의 인물이 대다수라는 연구결과가 있어 후자의 견해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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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의 무과 응시자격을 둘러싼 논란과는 대조적으로 조선후기에는 『속대전』에서 천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무과에 응시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조선후기에는 법제상 천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무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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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자료를 정리하면서 관찬사료를 인용하고 족보의 기록은 제외시켰다.
0자료인용: ‘한국학중앙연구원’
0김계원은 ‘조선왕조실록’, ‘경태4년 계유무와 동년방’, ‘고문서집성’
0김영징은 강희 38년(숙종25년) 1699년 김항(金沆) 한성부호적을 인용하였다.(김항은 김영징의 아들)
0등위’란 숫자표시 중 100단위 이상의 숫자는 총합격자의 일련번호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