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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2) 절의(節義) |
여말제현(麗末諸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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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번 |
세(世) |
휘자(諱字) |
시대(時代) |
비고 |
1 |
19世 |
약시(若時) |
우 왕 |
|
2 |
19世 |
약항(若恒) |
공민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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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19世 |
승길(承吉) |
공민왕 |
|
4 |
20世 |
자진(子進) |
공민왕 |
충렬록 자료 自進 |
편집자 주
① 절신이라 함은 충절과 절의를 지킨 충신(忠臣)들을 이르는 말이다.
② 고려말(高麗末) 두문동 72현(杜門洞七十二賢) : 1392년 7월 고려(高麗)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개국하자 불사이군(不仕二君)의 뜻을 품고 두문동[杜門洞 :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開豊郡 光德面 光德山) 서쪽에 들어가 충절을 지킨 고려의 충신 72명을 말한다.
이태조(李太祖)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반대(反對)한 고려(高麗)의 수절신(守節臣)으로 처음에 개성(開城)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가 뒤에 뿔뿔이 지방으로 흩어져 은거(隱居)하여, 국가사기(國家史記)에 72현의 명단이 전해오는 것이 없고, 그 후손들의 가문(家門)의 기록과 선현(先賢)들의 문적(文籍)에 명단(名單)과 사적(事蹟)이 전해온다.
※ 화해사전(華海師全) 고려 후기 학자 신현(申賢 1298~1377)의 전기(傳記)에 기록된 72인
우현보(禹玄寶)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고천상(高天祥) 전귀생(田貴生) 이숭인(李崇仁) 이맹예(李孟藝) 유순(柳洵) 전조생(田祖生) 조승숙(趙承肅) 채귀하(蔡貴河) 서보(徐輔) 김충한(金忠漢) 변숙(邊肅) 박심(朴諶) 신안(申案) 박영(朴寧) 고천우(高天佑) 서중보(徐仲輔) 조안경(趙安卿) 이색(李穡) 이유(李裕) 조견(趙堅) 허금(許錦) 이수인(李守仁) 정희(鄭熙) 이석지(李釋之) 길재(吉在) 원천석(元天錫) 김주(金澍) 최양(崔瀁) 전오륜(全五倫) 조홍(趙洪) 김자수(金自粹) 이사경(李思敬) 이수생(李遂生) 김약시(金若時) 남을진(南乙珍) 이행(李行) 이윤(李淪) 이양중(李養中) 서견(徐甄) 임탁(林卓) 김육록(金六鹿) 변귀수(邊貴壽) 안종약(安從約) 김준(金俊) 윤육(尹陸) 박침(朴沈) 배상지(裵尙志) 구홍(具鴻) 이유인(李唯仁) 박문수(朴門壽) 성사재(成思齋) 민보(閔普) 임등(林등) 차원부(車元夫) 최문한(崔文漢) 신석(申釋) 신자악(申自嶽) 김위(金瑋) 민안부(閔安富) 신덕린(申德麟) 신포시(申包翅) 박의중(朴宜中) 이신(李晨) 박태시(朴太始) 이경(李瓊) 맹호성(孟好性) 길인적(吉仁迪) 신이(申彛) 반모(潘모)
※ 고려말 충렬록(忠烈錄)에 수록된 절신(節臣) 42인
정몽주(鄭夢周) 이존오(李存吾) 정추(鄭樞) 맹유(孟裕) 도동명(陶東明) 도부(都膚) 이사지(李思之) 장안세(張安世) 국유(鞠有) 정광(程廣) 한철충(韓哲沖) 나천서(羅天瑞) 정온(鄭溫) 맹희도(孟希道) 성부(成溥) 허징(許徵) 이명성(李明誠) 정지(鄭地) 하자종(河自宗) 김진양(金震陽) 안성(安省) 김선치(金先致) 김약긍(金若긍) 이종학(李鍾學) 이연(李涓) 민유(閔愉) 문익점(文益漸) 조희직(曺希直) 송인(宋寅) 곽추(郭樞) 조철산(趙鐵山) 김사염(金士廉) 윤충보(尹忠輔) 채왕택(蔡王澤) 송교(宋皎) 최칠석(崔七夕) 김자진(金自進) 김승길(金承吉) 범세동(范世東) 조유(趙瑜) 김제(金濟) 임란수(林蘭秀)
※ 규장각(奎章閣) 충렬록두문동제현선생실기(忠烈錄杜門洞諸賢先生實記)에서 고려말 입절사의자(立節死義者)로 평가된 72인과 추가된 2인 74인의 명단
고천상(高天祥) 고천우(高天祐) 곽추(郭樞) 구홍(具鴻) 국유(鞠孺) 길인적(吉仁迪) 길재(吉再) 김광치(金光致) 김사렴(金士濂) 김승길(金承吉) 김약시(金若時) 김약항(金若恒) 김위(金瑋) 김육록(金六鹿) 김자수(金自粹) 김제(金濟) 김주(金주) 김준(金俊) 김진양(金震陽) 김충한(金沖漢) 길재(吉再) 나천서(羅天瑞) 남을진(南乙珍) 도응(都膺) 도동명(都東明) 류순(柳洵) 맹유(孟裕) 맹호성(孟好性) 맹희도(孟希道) 문익점(文益漸) 민보(閔普) 민안부(閔案富) 민유(閔楡) 박문수(朴門壽) 박심(朴諶) 박녕(朴寧) 박의중(朴宜中) 박침(朴忱) 박태시(朴太始) 반모(潘모) 배상지(裵尙志) 변귀수(邊貴壽) 변숙(邊肅) 서견(徐甄) 서보(徐輔) 서중보(徐仲輔) 성부(成溥) 성사제(成思齋) 송인(宋寅) 신덕린(申德隣) 신석(申釋) 신안(申晏) 신이(申彛) 신자악(申自嶽) 신포시(申包翅) 안성(安省) 안종약(安從約) 우현보(禹玄寶) 원천석(元天錫) 윤륙(尹陸) 이경(李瓊) 이맹예(李孟藝) 이명성(李明成) 이사경(李思敬) 이사지(李思之) 이색(李穡) 이석지(李釋之) 이수생(李守生)이수인(李守仁) 이숭인(李崇仁) 이약(李약) 이양소(李陽昭) 이양중(李養中) 이연(李涓) 이유(李裕)
사화(士禍) |
|
연번 |
세(世) |
휘자(諱字) |
시대(時代) |
비고 |
1 |
24世 |
구(絿) |
조선조 중종 |
기묘사화(己卯士禍) |
2 |
23世 |
신동(神童) |
조선조 중종 |
기묘사화(己卯士禍) |
3 |
22世 |
기서(麒瑞) |
조선조 중종 |
신사사화(辛巳士禍) |
4 |
23世 |
경희(景熹) |
조선조 명종 |
을사사화(乙巳士禍) |
5 |
27世 |
효성(孝誠) |
조선조 광해군 |
계축사화(癸丑士禍) |
6 |
26世 |
우급(友伋) |
조선조 광해군 |
계축사화(癸丑士禍) |
7 |
28世 |
여성(汝聲) |
조선조 광해군 |
계축사화(癸丑士禍) |
8 |
24世 |
영(坽) |
조선조 광해군 |
계축사화(癸丑士禍) |
9 |
29世 |
익훈(益勳) |
조선조 숙종 |
기사사화(己巳士禍) |
10 |
30世 |
만중(萬重) |
조선조 숙종 |
기사사화(己巳士禍) |
11 |
27世 |
이성(履成) |
조선조 숙종 |
기사사화(己巳士禍) |
12 |
32世 |
운택(雲澤) |
조선조 경종 |
신임사화(辛壬士禍) |
13 |
32世 |
민택(民澤) |
조선조 경종 |
신임사화(辛壬士禍) |
14 |
32世 |
용택(龍澤) |
조선조 경종 |
신임사화(辛壬士禍) |
15 |
31世 |
일경(一鏡) |
조선조 경종 |
신임사화(辛壬士禍) |
편집자 주
① 경전의 진리를 영원히 불변하는 것으로 전제하여 날줄로 인식하고 시대에 따라 양상이 변화하는 역사를 씨줄로 인식함으로써 경전과 역사를 날줄과 씨줄로 엮는 것이 경경위사정신이다. 예컨대 진선미(眞善美)라든가 효도와 같은 보편적인 진리는 세상이 바뀌어도 변함없는 진리이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철학과 역사를 상호보완하여 인간사를 파악하는 경경위사정신은 동양사회가 면면하게 지켜온 인문정신이며 우리의 정신문화를 고양시킨 토대가 되었다. 이상적 인간형은 감성의 발현인 인정과 인간으로써 지켜야 할 도리인 의리를 잘 조화시키는 사람이다. 너무 인정에 치우치면 기준이 모호해져 부패하기 쉽고 의리만 따지다 보면 세상살이가 삭막해져 살맛이 나지 않는다.
인정과 의리를 잘 조화시켜서 부드러우면서도 기준이 있고 분명하게 따지면서도 따뜻한 심성을 가진 균형감각이 있는 인간이 바람직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 중용적 인성론이다. 논어(論語)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나 연암 박지원의 법고창신(法古創新)도 경경위사정신(經經緯史精神)의 인식에 근거한다.
알아두기
①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 14)에 남곤(南袞)․심정(沈貞)등 훈구파 재상(勳舊派宰相)들이 당시 새로운 혁신을 감행한 젊은 선비들에게 화(禍)를 입힌 사건이다. 연산군(燕山君)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中宗)은 정치를 개혁하고 패기에 넘치는 조광조(趙光祖)등 신진사류(新進士類)를 등용하여 성리학(性理學:주자학)을 크게 장려하였다. 이에 조광조 등은 중종의 신임을 받아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행하고 자격이 없는 공신들의 공신호(功臣號)를 박탈하는 등 과격한 혁신정책을 썼다. 여기에 불안을 느낀 심정·남곤·홍경주(洪景舟) 등이 갖은 모략과 음모로써, 조광조 일파가 민중의 지지를 받아 반역을 꾀하려 한다고 주장하여, 30대 젊은 선비들이 죽음을 당하고 이를 옹호한 대신들이 파면되거나 죽음을 당하였다.
② 신사사화(辛巳士禍)
1521년(중종 16)에 안처겸(安處謙) 일파들이 심정, 남곤 등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이다.기묘사화로 인하여 세력을 잃은 안당(安塘)의 아들 안처겸은 남곤, 심정이 사림(士林)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하여 이들을 제거 할 것을 모의 하였다. 때마침 안처겸은 모친상을 당했는데 남곤의 부하 송사련(宋祀蓮)은 여기에 방문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 이들이 대신들을 해치려 한다고 무고하여 관계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는 큰 옥사(獄死)가 일어났다.
③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명종 원년)에 왕실의 외척(外戚)인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건이다.세자(世子:인종)의 외숙(外叔)인 윤임(尹任) 일파의 대윤과 경원대군(慶原大君:명종)의 외숙인 윤원형(尹元衡) 일파의 소윤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암투가 벌어졌는데 1544년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이 득세했다.
④ 계축사화(癸丑士禍)
1689년(숙종 15)에 서인(西人)과 남인(南人)들 사이에서 정치적 야욕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정권을 장악한 서인의 송시열(宋時烈) 등은, 소의 장씨(昭儀張氏:장희빈)의 아들(후에 경종)을 원자(元子)로 책봉하는 것은 시기가 빠르다고 반대했는데, 이를 계기로 실각(失脚)중이던 남인들이 왕을 충동하여 서인들이 축출당하는 큰 옥사가 일어났다.
⑤ 기사사화(己巳士禍)
1689년(숙종 15)에 서인(西人)과 남인(南人)들 사이에서 정치적 야욕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정권을 장악한 서인의 송시열(宋時烈) 등은, 소의장씨(昭儀張氏:장희빈)의 아들(후에 경종)을 원자(元子)로 책봉하는 것은 시기가 빠르다고 반대했는데, 이를 계기로 실각(失脚)중이던 남인들이 왕을 충동하여 서인들이 축출당하는 큰 옥사가 일어났다.
⑥ 신임사화(辛壬士禍)
1721년(경종 1)에서 1722년(경종 2) 사이에 일어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대립으로, 신축(辛丑)·임인(壬寅) 양년에 걸쳐 일어났다 하여 신임사화라고 하며 일명 임인옥(壬寅獄)이라고도 한다.
심신(心身)이 허약한 경종(景宗:장희빈의 아들)이 즉위하자 노론파(老論派) 김창집(金昌集)등의 건의로 왕세제(王世弟) 연잉군(延仍君:영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代理聽政:왕 대신 정사를 봄)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소론파의 김일경(金一鏡) 등은, 노론측이 왕의 신병을 조작하여 발설하였다 하여 노론 4대신-김창집·이건명·이이명·조태채를 탄핵하고 유배를 보내는 등 옥사를 일으켰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의병장(義兵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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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번 |
세(世) |
휘자(諱字) |
시대(時代) |
비고 |
1 |
24世 |
해(垓) |
조선조 선조 |
근시재(近始齋) |
2 |
31世 |
덕령(德齡) |
조선조 선조 |
충장공(忠壯公) |
편집자 주)
김해(金垓)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의병장, 字는 달원(達遠) 호는 근시재, 아버지는 참봉 부의(富儀)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정랑 습(習)의 딸이다. 선조22년(1588) 생원시에 2등 9인으로 합격하고 이듬해에 증광시 문과에 을과 7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예문관 검열에 제수되었으나 동료중 사초를 불태운 사건에 연루되어 향리로 내려와 학문에 정신하였다.
선조 26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니 의병장에 추대되고, 이정백(李庭栢) 배용길(裵龍吉)을 좌우부장으로 삼아 좌도의진을 편성, 적을 추격하였다. 주요 전장인 당교(唐橋), 용궁(龍宮), 함창(咸昌) 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우고 예천 송구촌으로 진을 옮겨 많은 왜적을 생포 또는 참살하였다. 이듬해 5월 밀양으로 내려오는 적을 추격하다가 경주에서 전사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총명하여 태극 음양에 대한 변의와 심성 이기에 관한 논설, 흥망 천문 지리 병법 등에도 깊은 조예를 가졌고, 조목(趙穆) 김성일(金誠一) 유성룡(柳成龍) 남치리(南致利) 등과 도의로 사귀었다. 수찬에 추증되고 고종 30년(1892)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양관대제학 성균관좨주에 가증되었다.
김덕령(德齡)
조선 의병장. 자는 경수(景樹). 광주 출신. 성혼(成渾)의 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 부사(潭陽 府使) 이경린(李景麟), 장성 현감(長城 縣監) 이귀(李貴)의 천거로 조정에서 종군(從軍)의 명령을 받았으며 전주(全州)의 광해군조(光海君朝)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를 받았다. 1594년 의병을 정돈,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된 후 권율(權慄)의 휘하에 들어가 일본군의 호남 지방 진출을 막기 위해 진해(鎭海)·고성(固城) 지방을 방어했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하여 수차에 걸쳐 적의 대군을 무찔렀고,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일본군을 기습, 격퇴하여 일본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의병장의 한 사람이 되었다.
1595년 도체찰사(都體察使)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을 장살(杖殺)하여 한때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자 이때부터 왕의 신임을 질투하는 대신들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다시 의병을 모집,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어 도중에 회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 순찰사 종사관이던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피체, 국문을 받았으나 혐의 사실을 부인, 대신들 간에도 찬반 양론이 분분한 가운데 옥사(獄死)했다.
1661년(현종 2)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 1678년(숙종 4)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祭享). 1681년 병조판서(兵曹判書)에 가증(加贈), 영조때 의열사(義烈祠)에 제향, 1788년(정조 12) 충장공(忠壯公)의 시호를, 1789년에 좌찬성(左贊成)에 가증 및 추서(追敍)되었으며 동년 4월 6일 부조(不祧)의 은전을 내리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정축(丁丑) 척화신(斥和臣) |
|
연번 |
세(世) |
휘자(諱字) |
시대(時代) |
비고 |
1 |
29世 |
익희(益熙) |
조선조 인조 |
호(號)는 창주(滄州) |
병자호란(丙子胡亂) 순절제신(殉節諸臣) |
|
연번 |
세(世) |
휘자(諱字) |
시대(時代) |
비고 |
1 |
29世 |
익겸(益兼) |
조선조 인조 |
시(諡)는 충정공(忠貞公) |
2 |
- |
수남(秀南) |
조선조 인조 |
호(號)는 만치당(萬痴堂) |
3 |
28世 |
득남(得男) |
조선조 인조 |
철관첨사(鐵串僉使) |
강도함성시(江都陷城時) 순절(珣節) 부녀록(婦女錄) |
|
연번 |
세(世) |
휘자(諱字) |
시대(時代) |
비고 |
1 |
29世 |
김반(金槃)의 처(妻) 서씨부인(徐氏夫人) |
조선조 인조 |
|
임오군란 사절신(壬午軍亂 死節臣) |
|
연번 |
세(世) |
휘자(諱字) |
시대(時代) |
비고 |
1 |
36世 |
보현(輔鉉) |
조선조 순조 |
|
항일 순절 의인(抗日 殉節 義人) |
|
연번 |
세(世) |
휘자(諱字) |
시대(時代) |
비고 |
1 |
38世 |
지수(志洙) |
한말(韓末) |
경술국치(庚戌國恥)때 자결 |
편집자 주)
◎ 병자호란 정축 척화신 1636년(인조 14) 12월에서 1637년 1월에 청나라의 조선 침입 전쟁(병자호란) 항복을 반대
◎ 병자호란 순절제신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금해 1월까지 청나라이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 순절신
◎ 강도 함성시 순절 부녀록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시 청국의 침입에 의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60여명의 부녀들이 자결
◎ 임오군란 사절신 1882년(고종 19) 6월 일본식 군제 도입과 민씨정권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구식군대의 군변시 자결
◎ 한말 항일 순절 의인 1910년 한일합방 또는 경술국치라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전국에서 약 30여명이 자결
호남절의록(湖南絶義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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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번 |
諱字 |
生涯 및 活動事項 |
備考 |
1 |
金德弘 |
司評 珝의 曾孫, 習讀 鵬燮의 子, 德齡의 兄 / 配享 義烈祠 /成牛溪門人 |
1권 |
2 |
金光運 |
忠肅公深 后, 贈判書 景憲의 子,(妻 梁氏/ 子婦 梁氏 丁酉立節幷旌閭)/李栗谷門人 |
|
3 |
金彦希 |
文正公 台鉉 后 贈參判 誠의 子, 贈掌樂正 宣武原從勳 |
|
4 |
金大成 |
大司諫 崇祖의 曾孫, 典翰 紀의 孫, 參判 汝鈺의 祖 |
|
5 |
金富行 |
密直司 天利의 后, 監司 緣의 子, 贈兵曹參議 |
|
6 |
金輔元 |
忠肅公 深의 后, 參奉 繪의 子, 晉州城陷落時 戰死(妻 李氏 夫死亦從死) |
|
7 |
金大民 |
文正公 台鉉 后, 僉使 沔의 子, 晉州城陷落時 戰死(孫 就砥 丙子倡義) |
|
8 |
金信民 |
文正公 台鉉 后, 僉使 沔의 子, 晉州城陷落時 戰死(子 義精 丙子倡義)/宣武原從勳 |
|
9 |
金允明 |
文正公 台鉉 后, 贈參議 希古의 子, 等 武科. 贈兵曹參議/扈聖原從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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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金德齡 |
持平 德弘의 弟, 贈 左贊成. 諡 忠壯公. 配享 義烈祠(夫人李氏 丁酉殉節 旌閭) |
2권 |
11 |
金弘宇 |
判書 仁雨의 后, 生員 景熹의 子 (子 汝聲/汝振/汝重/ 丁卯擧義) |
|
12 |
金德宇 |
號 良村, 判書 仁雨의 后, 生員 景熹의 子, 同樞 |
|
13 |
金麒壽 |
號 晩翁, 都事 球의 子, 司僕寺正/ 宣武原從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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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金彦立 |
縣監 麟의 玄孫, |
|
15 |
金弘烈 |
縣監 自中의 后, 參奉 克通의 子. 登 武科,/ 宣武原從勳 |
|
16 |
金貴仁 |
字 愛贒(애현)/ 宣武原從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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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金成遠 |
字 剛叔, 贊成 瑊의 孫, 登 司馬, 察訪, (丁酉年 母夫人과 同死) |
|
18 |
金贊元 |
號 悠悠亭, 縣監 約의 子, |
|
19 |
金弘淡 |
字 子元, 幸州城戰, 露粱海戰/ 宣武原從勳 |
|
20 |
金彦忠 |
字 義執, 府使 漢寶의 孫/ 宣武原從勳 |
|
21 |
金憲 |
大司成 成玉의 后, 校理 浹의 孫, 登 武科/子 成命 丁卯扈從 丙子倡義 |
3권 |
22 |
金致顉 |
號 守眞, 判校 彦琚의 后, 主簿 光符의 자, 첨정/ 宣武原從勳 |
|
23 |
金禧周 |
字 良佐, 上護軍 晉의 后, 府使 貴祥의 玄孫/ 宣武原從勳 |
|
24 |
金東達 |
號 徵谷, 鳳谷 東準의 弟, 登 司馬/ 石溪 崔命龍門人 |
|
25 |
金汝剛 |
號 松庵, 參奉 麒瑞의 曾孫, 壬辰倡義 德宇의 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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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金得孝 |
別提 億의 孫, 僉正 璉의 子/ 宣武原從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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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金萬同 |
佐郞 閱의 后, 參議 達孫의 曾孫, 登 武科, 主簿/ 宣武原從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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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金永守 |
字 德保, 登 武科, 守門將/ 宣武原從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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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金聲遠 |
號 秀巖, 參判 淸의 曾孫, 進士 克粹의 子/ 李忠武公 後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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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金溥 |
號 竹軒, 贊成 達孫의 后, 贈參議 彭壽의 子/ 宣武原從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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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金壽淵 |
大司成 成玉의 后, 縣監 混의 子, 登 武科/ 宣武原從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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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金珽 |
字 公瑞, 號 南溪, 文科 司藝 瑚의 玄孫, 參奉 仲謙의 子. 登 司馬/長 澤南, 次 式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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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金誨 |
字 時望, 上護軍 承晉의 后, 宣武功臣 判官 應湖의 孫, 登 武科, 主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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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金世 |
字 敬汝 兵使 壽延의 后, 牧使 好仁의 5世孫/ 宣武原從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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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金孝生 |
字 寶卿, 直提學 瞻의 后, 府使 喜의 子, 登 武科, 主簿/ 宣武原從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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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金孝信 |
大司成 成玉의 后, 贈參議 志의 子, 登 武科/宣武原從勳 |
4권 |
37 |
金介民 |
文正公 台鉉의 后, 判官 濂의 子, 登 武科/ 振武原從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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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金尙瓊 |
大司成 成玉의 后, 宣傳 仁豪의 子, 登 武科, 都摠/ 振武原從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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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金仁邦 |
文正公 台鉉의 后, 參奉 得公의 子, 訓練判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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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金春景 |
掌令 元龜의 后, 參奉 蘭之의 子/ 振武原從勳(5世孫 尙華 戊申錄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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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金德普 |
字 子龍, 忠壯公 德齡의 弟, 贈 執義, 配享 義烈祠/ 高霽峰門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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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
金聲夏 |
號 守愚, 監察 東準의 子, 副護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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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金成命 |
號 海隱, 壬辰殉節 憲의 子, 登 武科, 僉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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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
金東準 |
號 鳳谷 生員 熙止의 子/(弟 東達 甲子/ 子 聲夏 丁卯/從孫 在寬 丙子/玄孫 聖濟 戊申 倡義) |
5권 |
45 |
金得男 |
號 梅竹軒, 贈 右尹 世豪의 孫, 贈 左尹 憶昌의 子, 登 武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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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
金承善 |
大司憲 德龍의 后, 察訪 彦璧의 子, 登 武科, 征虜校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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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
金汝璉 |
文正公 台鉉의 后, 掌令 孝慎의 5代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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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
金義精 |
文正公 台鉉의 后, 壬辰倡義 信民의 子(丙子 六從兄弟 共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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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
金就砥 |
文正公 台鉉의 后, 壬辰殉節 大民의 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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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
金華俊 |
號 棠溪, 壬辰扈從 珽의 孫, 參奉 式南의 子, 登 文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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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
金漢一 |
參奉 世饒의 孫, 郡守 益貴의 子, 登 武科, 興陽監牧官, 贈參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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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
金得元 |
文正公 台鉉의 后, 贈 副正 彦希의 子, 贈 參議(弟 處元과 丙子 倡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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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
金成俊 |
字 英叔 文肅公 周鼎의 后, 賜 丁丑登扈從科, 訓練奉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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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
金億龍 |
字 雲卿, 丙子從 李雲巖 戰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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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
金聖濟 |
號 雲田, 斥和 東準의 玄孫, 丁卯倡義 聲夏의 曾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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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
金致久 |
忠肅公 深의 后, 察訪 彦龍의 曾孫, 登 武科, 都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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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
金汝聲 |
文肅公 周鼎의 后, 進士 戒鍟의 玄孫, 上護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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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
金尙華 |
字 相集, 甲子樹勳 春景 五世孫, 主簿 起澄의 子/揚武原從勳 |
편집자 주)
①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이란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년), 이괄의 난(李适 亂 1624년),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 이인좌 의 난(李麟佐 亂 1728년) 등에서 의거(義擧)를 일으켜 절의(節義)한 호남(湖南)사람들의 사적(事蹟)을 기록한 책이다. 5권 5책. 목활다본(木活字本)으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7대손(7代孫)인 고정헌(高廷憲)이 1779년(正祖 3)에 간행(刊行)하였다. 구성은 책 머리에 홍양호·고정헌의 서문과 난들의 경과와 결말을 적은 총론, 권1 상으로부터 권5 하에 이르기까지 총 1,200여 명에 관한 사적이 기재되어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인좌의 난에 관해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는 2차 자료이다. 國立中央圖書館과 晟峰/金壯潤家에 소장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