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 인물사

본문

10) 청백리(淸白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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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번

세(世)

휘자(諱字)

관(官)

시대(時代)

아호(雅號)

1

19世

약항(若恒)

대사성(大司成)

태종(太宗)

척약재(惕若齋)

2

?

장(廧)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세종(世宗)

 

3

22世

겸광(謙光)

좌찬성(左贊成)

성종(成宗)

서정(西亭)

4

24世

구(絿)

홍문관부제학

(弘文館副提學)

명종(明宗)

자암(自庵)

5

25世

개(鎧)

판서(判書)

명종(明宗)

독송정(獨松亭)

6

27世

장생(長生)

참판(參判)

선조(宣祖)

사계(沙溪)

 

편집자 주

 

① 청백리(淸白吏) : 청백리(淸白吏)는 그의 인품(人品), 경력(經歷), 치적(治績)등이 능히 백관(百官)의 모범이 될 만한 인물(人物)이어야만 청백리(淸白吏)로 녹선(錄選)된다. 청백리(淸白吏)로 뽑히면 품계(品階)가 오르고 그 자손은 음덕(蔭德)으로 벼슬할 수 있는 특전(特典)이 있다. 따라서 본인(本人)은 물론 일문(一門)의 큰 영예로 여겼다. 청백리(淸白吏)는 의정부(議政府), 육조(六曹), 한성부(漢城府)의 3품이상의 관원(官員)과 대사헌(大司憲), 대사간(大司諫)등이 후보자(候補者)를 엄격(嚴格)한 심사(審査)를 거쳐 왕의 재가(裁可)를 얻어 녹선(錄選)한다.

 

② 광산김씨사에는 4명(약항,겸광,개,장생)이고, 문정공파보·문숙공파보에는 6명(약항,장,겸광,굉,개,장생)으로 되어있으나, 굉(硡)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청선고(淸選考), 전고대방(典故大方), 대동장고(大東掌攷) 등에 등재되어있지 않다.

 

③ 1695년(숙종 21)에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청백리를 뽑으면서 살아 있는 경우에는 '염근리(廉勤吏)', 죽은 후에는 '청백리'라고 호칭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확히는 명종 대부터 살아 있는 자는 염근리라는 명칭을 붙여 선발했고, 특별한 과오가 없는 한 사후에는 청백리로 녹선(錄選)하였다.

 

④ 김장(金廧):전고대방(典故大方)에 본관은 광산(光山)이나 부모 등은 불명이며, 시은공파보(市隱公派譜)에 光山인으로 분류. 생원으로 태종8년(1408)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다음해 예문관검열을 지낸 뒤 사관(史官)을 거쳐 세종즉위년(1418) 병조정랑을 역임하였으며 1420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근무할 때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⑤ 김구(金絿) : 청선고(淸選考) 編에 김구(金玽)로 되어 있음. [중종실록]을 보면 김구(金絿)가 맞으며 옮기는 과정에서오기(誤記)로 보인다.

 

⑥ 조선 전시기를 통해 청백리에 녹선된 수는 명확히 알 수는 없다. 선정한 사람에 따라 수가 다르나 이규건 선생이 밝힌 청선고(淸選考)에서는 189명, 전고대방(典故大方)에는 218명, 증보문헌비고(贈補文獻備考)에는 142명, 한국성씨대관(韓國性氏大觀)에는 179명, 김원태씨의 역대청백리상에는 216명, 조선조에는 228명이란 기록이 있으며 이현종씨의 청백리정신과 열전에는 219명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200여명 내외로 선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