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 김흥광

본문

9.都有司 會長 金良洙는 神武王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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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수 씨는 양간공파 후손이다 대종중(평장동)도유사 2次 重任과 2, 3, 7代 대종회장을 역임 하였다 김양수(金良洙)씨는 1957년 정유대동보 수보에 앞서 경보(京譜)의 시조공 헌강왕자설을 통박(痛駁)하며, 향승(鄕乘)에 따라 신무왕 제3자로 수정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양수씨의 글을 요약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경보(京譜)란 1677년에 만든 김만기 서석보 와, 그 아들 진규가 1687년에 계속증보한 죽천보인데 이 때 허무맹랑한 헌강왕자설을 창설(創設)한 것으로 믿는데 1747년 정묘보, 1876년 병자보, 1939년 기묘보 까지 시정(是正)없이 묵과되는 해괴(駭怪)스러운 일이 계속되고 있다.

 

지금과 다른 구식 봉건전제 시대의 경황으로는 설사 그 잘못을 알고서도 감히 그런 의사를 발표하지 못하였다. 즉 그때의 도청유사(都廳有司)들은 다 보국판서(輔國判書)니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지위 높은 양반들이기 때문에 시골일가들을 초개시(草芥視)하였고 다소의 이견이 있더라도 그들의 위세에 눌리어 함구무언(緘口無言)하였다는 눈물겨운 고로(古老)들의 술회도 들은바 있다. -생략- /  

 

김양수(1896~1971) 약력

출신지 :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면 장천리 128(본적)

학   력 : 일본 조도전대학 정경학부 졸업, 미국 콜럼비아대학 졸업, 영국 런던대학 수학

1925년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제2차 범태평양회의에 조선대표로 참석하였다.

           성명을 통하여 총독정치의 진상을 폭로하였다.

1926,   1927년 미국 뉴욕에서 『삼일신보(三一申報)』의 주필로 교포들의 독립정신 고취에 주력하였다.

           독일 베르린 세계반제동맹회의에 참석하였다.

1931년  영국에 건너갔다가 중국을 거쳐 귀국하였다.

           이 때 중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났으며,

           특히 김두봉(金枓奉)과는 한글운동에 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1935년  조선어학회에 참여, 사전편찬사업의 재정적 뒷받침을 담당하였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1945년 1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았다 해방 후 전라남도 순천건준회위원장, 독촉국민회 순천지부장, 한민당 순천군당 위원장 등 역임,

1947년  민통 재정부장,  한민당 중앙위원,  

1948년  한국민주당 상우위원(韓國民主黨 常務委員),  

           순천군수 피임(順天郡守 被任)

1950년  독촉국민회 중앙본부 총무부장,

           민족통일총본부 재정부장,

           반탁투쟁위원회 중앙본부부장,

           한국민족대표자대회 재정분과위원장,

           선거대책위원회 중앙본부 감찰부위원장,

           한국민족외교후원회 부위원장,

           한국민주당 중앙상무집행위원(中央常務執行委員),

           2대 국회의원(전라남도 順天, 民主國民黨) 당선

           조선흥업주식회사 중역 역임

           원자력원장을 역임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여야 어느 누구에나 혐악를 받지 않는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인물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