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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역사학자 김용섭은 신무왕자 라고 하였다 |
전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용섭 박사는 2001년 [역사학보] 172집에[고려 충렬왕조의 (광산현제영시서의 분석)] 이라는 주제와 -신라 김씨가 관향의 광산지역 정착과정을 중심으로- 라는 부제의 논문을 발표 하였다 이논문은 경북대학교 이수건 교수의 [중세기 토성의 관향에 관한연구]라는 논문중 광산김씨 광양김씨 부회설에 반박하는 대응의 연구논문이다
高麗 忠烈王朝의 <光山縣題詠詩序>의 分析
ㅡ新羅 金氏家 貫鄕의 光山地域 定着過程을 中心으로ㅡ
1序言
2<題詠詩序>의 撰者와 撰述動機
3資料에서 볼수있는 金氏家 先代의 世系와 貫鄕
4羅末 高麗時期의 政治的 混亂과 金氏家 貫鄕의 定着過程
5結語
신라말년의 왕권쟁탈과 김씨가의 무주지역 복거
ㅡ상략 그<표1>에서 보는바와 같이 김씨가 관향의 제1기는 김씨가가 신라김씨 로서 무주지역에 적을 올리고 무주인(광주인 광산인)으로서 살아가던 시기였다ㅡ
중략ㅡ김씨가의 시조 김흥광도 그 정확한 시점은 분명치 않지만 왕위 쟁탈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 이곳 무주지역으로 피난하고 은가하게 된 것 이었다
ㅡ상략 김씨가 가 무주지역에 은거하여 살게된 시발점을 세계상으로 신무왕대 이후라고 한 것은 김흥광이 제3왕자라고 하는 것은 널리 알려저 있었으나 어느왕의 제3왕자인지 분명치 않은 가운데 김길이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고려 태조의 건국과정에서 활약한 인물임은 분명 하였음으로 전후의 역사과정과 사람 등의 수명을 고려 할 때 그 조부
김 흥광은 신무왕의 제3자로 추정 될수 있었기 때문 이었다 신무왕에게는 왕자가 4명이나 있었던 것으로 이해 돠고 있었다
ㅡ상략 그뿐만 아니라 신라왕실내의 왕위 쟁탈전에서 무주 관내로 피난하였던 것은 신무왕계였음이 사서의 기록상 분명 하였고 신무왕을 보좌하여 왕권을 쟁취하게 하였던 김양도 무주도독을 지낸바 있었음으로 그리고 김흥광이 은거하게 된 지역도 무주 였다는 점에서
김씨가의 시조 김흥광은 신무왕의 제3왕자 였을 것 으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갖게 된것이다 하략
ㅡ상략 지금 까지도 나주 인근에 왕조대 와 더불어 고적으로 남아있는 왕자대 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지리지에서는 이 왕자대 를 속전에 따라 다만 삼국시 왕자가 유진한곳 또는 신라 왕자가 유진한곳으로 언급 하였고 김정호는 특히 이 왕자대 에 안설을 달아 신무왕이 미시에 유진 하였던 곳 이라고 까지 기술 하고 있다 그러나 신무왕이 왕위를 다툴 때 의 지위는 왕자가 아니였음 으로 이곳 왕자대가 이름 그대로 왕자의 대라면 여기서의 왕자는 신무왕이 아니라 시대를 좀 내려가 신무왕의 제3자 김흥광 으로 보아야 하겠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