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 김흥광

본문

10.京譜 以前에는 神武王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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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공파 삼사좌사공 12세 종손 김여옥의 신도비 비문에 시조공을 신라 신무왕자라 하였다

비문은 박게채(朴世采 1631-1695)기 지었다 1683년경 김여옥의 손자 김회영(1635-1705)이 김여옥의 손녀사위 기정익(奇珽翼1627-1690)이 지은 행장을 갖이고 와서 부탁해 지었다고 하였다  김여옥 신도비 비명은 경보 정묘보(1747) 이전의 글이다

 

金汝鈺 神道碑銘 김여옥 신도비명 박세채(朴世采) 지음

살갑지 못한 나 박세채가 약관(弱冠, 남자 나이 스무 살이 된 때)의 나이에 배척당하여 과거 공부를 폐기한 처지라 경사대부(卿士大夫)를 따라 교류한 것이 드물었을 때에, 유독 일찍이 고(故) 관찰사(觀察使) 김공(金公, 김여옥)을 우연히 만났었는데, 김공은 나를 비천(卑賤)하다 여기시지 않으시고 번번이 더불어 사의(事義)에 대하여 토론하기를 그만두지 않으시므로, 내가 공경하고 믿어 받들며 그 분이 당시에 성정(性情)이 강직하고 특별히 우뚝하여 군자(君子)라고 일컬을 만한 사람임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다.

 

얼마 안 되어 효종(孝宗)께서 무용(武勇)이 뛰어난 사람을 맨 먼저 찾아내고 한편으로 재주와 지혜가 투철한 이를 초치(招致)할 때를 당하여, 장차 크게 청(淸)나라에 대한 수치(羞恥)를 보복하여 설욕하려는 사건이 있어, 이에 공에게 서쪽 관문(關門)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기려고 임금이 헌(軒)에 임하여 방략(方略)을 자문한 다음에 보냈는데, 공도 역시 힘쓰기로 계획한 것을 분발하여 생각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효종께서 승하(昇遐)하신 변고를 듣고는 아침저녁으로 애통해 하기를 부모(父母)를 잃은 것같이 임하면서, 시행할 바가 없음을 근심하고 답답하게 여기다가 돌아가서 3년을 지나 공이 또한 관사(館舍)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 소식을 들은 자는 탄식하며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내가 애통해 함은 더욱 심하였었다.

 

지금 공의 손자인 김회영(金會英)이 기정익(奇挺翼) 군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신도(神道)의 비문(碑文)을 나에게 위촉하는데, 아! 어떻게 감히 사양하겠는가? 공의 휘(諱)는 여옥(汝鈺)이고 자(字)는 군수(君粹)이니, 신라(新羅) 신무왕(神武王)의 아들 김흥광(金興光)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서 특별히 광산(光山, 광주(光州))으로 이적(移籍)하였는데, 이분이 공의 선조이시다. 고려(高麗) 때에 그 후손이 8대를 연이어 평장사(平章事)가 되어 모두가 이름난 공경(公卿)이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들의 사는 곳을 호칭하여 ‘평장동(平章洞)’이라고 하였다.  (중략)

 

손자 회영(會英)이 사실상 공의 제사를 모셨으며, 아들 둘을 낳았는데 진사 천여(天與)와 천뢰(天賚1668생/ 譜 天老)이며, 딸 셋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회영이 공의 유사(遺事)를 적어 와서 나에게 묘지(墓誌)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앞에서 말한 팔송공(八松公)은 바로 나의 조부이고, 남궁 부인은 선친에게 이종 누나가 된다. 선친이 평소에 매번 공을 지칭하여 남쪽 고을의 호걸이라고 하였다. 하루는 공이 분암(墳庵)으로 선친을 찾아왔다. 그때 공이 농담으로“힘겹게 지키는 절개는 오래 못 가지.[苦節不可貞]”라고 말하자 선친이 빙긋이 웃으며 이를 바로잡아 주었다.

 

나는 어릴 때 공을 곁에서 모시면서 그 덕을 보아 왔다. 공은 용모에서는 보통 사람보다 나

을 것이 없었지만, 그 몸에서 우러나는 기운이 특출하고 말솜씨가 시원시원하여 듣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았다. 공의 말년에 또 파산으로 찾아뵈었더니, 평안도 관찰사에서 그때 막 돌아왔음에도 집안은 썰렁하고 입은 옷은 검소하였다.

 

그래서 혼자 속으로 탄식하며 공의 검소함이 쇠퇴한 풍속에 자극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제는 세상에서 이런 인물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번 묘지명을 짓는 일은 그 비중에 비해 문장력이 부족하여 두렵기는 하지만 내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에 삼가 명(銘)을 짓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