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 김흥광

본문

1.숭혜전지(崇惠殿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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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숭혜전(崇惠殿)의 창시(創始)와 연혁(沿革)

신라 경순왕이 나라를 양국(讓國)한 후에 옛 도읍의 유민(遺民)들이 왕께서 백성에게 배푼 덕의를 사모 하여 월성(月城)에 사당을 세워 영정(影幀)을 모시고 매양 명절에는 고을의 아전이 삼반관속(三班官屬)을 이끌고 제향을 올렸으니, 이는 초(楚)나라 사람들이 일간모옥(띠로 지붕을 이은집)에서 초나라 소왕(昭王)에게 제사지낸 의례에서 나온 것이다. 불행히 임진왜란에 묘우(墓宇)가 불탔으며 그 후부터는 제향을 올리는 의식을 화상(畵像)으로서 하지 아니하고 나무로 만든 위패로서 봉행 하였다.

 

천계(天啓) 7년(인조5년, 1672년) 정묘(丁卯)에 후손 김시양(金時讓)이 경주부윤(慶州府尹) 으로서 본부에 이르러 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인하여 중건(重建)하기를 계청(啓請:임금에게 아뢰어 청함)하였으며 본부의 유생 김성원 등으로 더불어 경주부의 동쪽 5리쯤 되는 금학산 아래 동천촌에 터를 잡고 사당을 옮겨 일신하게 중건 하였다.

 

그리고 참봉 1인을 두어 제향을 받들게 하였고(예조에서 차출하였음) 또 노비의 전지를 설치했으며, 제전(祭奠)은 관에서 담당하여 변, 두(대와 나무로 만든 제기) 각 7기로 한정 하였다.

 

그 후 97년째 되는 경종 3년(1723년) 계묘(癸卯)에 본도감사 조태억(趙泰億)이 순행 하다가 본부에 이르러 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인하여 장계(狀啓:임금에게 올리는 글)로서 청원하여 특히 경순왕 전호(殿號)의 선액(임금이 내린 선호)을 받았으며 요미(料米)와 말먹이는 콩도 모두 일정한 수량이 있었고 유생 51인과 수호군 20인과 전졸 6명을 두었다.

 

정조 18년(1794년) 갑인(甲寅)에 정전 후면에 사태가 떨어지는 환난으로서 참봉 김건항(金健恒)이 궐문에 호소하였고 도신(道臣)이 장계를 올림으로서 특히 이건(移建)하라는 분부를 받들어 본도 감사 조진택(趙鎭宅)으로 하여금 터를 잡아 계문(啓聞: 임금에게 아룀)하게 하였으며 (곧 황남성) 본부윤 송전은 기일에 어긋날까 두려워하였다.

또 장수승(長水丞) 이명기(李命基)에게 분부를 내려 왕의 화상을 다시 본뜨게 하였다.

왕이 일찍이 영천 불당의 후면 감실(위패나 영정을 모시는 방)에 간직했다가 본전으로 옮겨 봉안 하였다.

 

그 후 17년 만에 본전을 이건 하였고 화상도 연구세심(年久歲深)하여 빛깔이 변했으므로 이 분부가 있게 되었다. 5월 18일 역사를 재시작하여 3개월 만에 낙성하여〔묘우(廟宇)가 오가삼간(五架三間)이요 내외 신문(神門)이 각 3칸이며 동 서재(東西齋)가 각 4칸이요 가관방(假官房)이 3칸이며 제기고(祭器庫)와 주장고(酒醬庫)가 각 1칸이요 좌우내문(左右內門)이 2칸이며 마구(馬廐)가 2칸이었다〕준공을 고하매 임금께서 친히 축문을 짓고 향을 내렸으며 8월초 10일 황남전에 봉안하였다. (위판은 정당의 당중에 모시고 영정은 정당의 후벽 감실에 모셨음)

 

다시 예조에 분부를 내려 규식(規式)을 정하게 했으니, 유생과 전졸은 각각 90여인이요 수호군 100여명과 양정(良丁) 20명과 하전(下典) 60명을 두었으며 호세는 오결(1결은10묶음)을 면제하게 하였고 참봉은 이조로부터 직첩을 내렸다. (또 가관 1인을 두어 참봉이 유고할 때에는 분향을 대행하게 하였음) 요미는 날마다 1석14두요 마태(馬太)는 10두이며 또 백미262석을 하사하여 공장의 식량 및 공역의 용도에 충당하게 하였고(공장의 식량이 43석이요 공역의 용도가 219석이었음) 무릇 공비(公費)가 10만8천6전 남짓하였다.

(성손이 4만3천6백전을 기증 하였고 참봉 김성휴가 만전을 희사하여 공역을 준공하였음)

 

정조 4년(1780년) 경자(庚子)에 부윤 김효대(金孝大)가 동천전에 비석을 세우는 일로서 소청(疏請)하여 곧 윤허(임금이 허락하심)는 얻었으나 공역을 갖추지 못한 때문에 분부가 내린 후 35년째 되는 갑술(甲戌)년(순조14년 1814년)에 이르러 황남전 정문밖에 신도비를 세우게 되었다.

 

순조 3년(1803년) 계해(癸亥)년에 계림에 유허비를 세웠다.

 

신도 비각은 1동 8면으로 되어 심히 치려하고 웅장했으며, 유허비각도 또한 이 제도를 모방 했으나 규모가 작았다.

 

고종 24년(1887년) 정해(丁亥)년 정언 김만제가 미추왕(味鄒王)과 경순왕(敬順王)을 병향(幷享)하는 일과 전호를 소청하였고, 판부사 김홍집이 경연(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에서 문무왕(文武王)을 병향(幷享)하는 일로서 진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이에 특히 본부윤 김철희에게 분부하여 묘우를 중건했으니, 오가오간(五架五間)이요(동 서재와 방과 곳간은 모두 잉구하였고 별달리 향축실 1칸을 사당 좌편에 건조하였음) 숭혜전의 선액(宣額)을 내렸으며 3왕의 위패를 만들고 경순왕의 영정을 다시 본떠서 무자(戊子)년 8월초 10일을 택하여 변 8기와 두(豆) 8기를 갖추고 향과 축문과 폐백을 내려 보내어 고유하고 봉안 하였다.(영정의 감실은 본묘내 동벽 아래에 별달리 마련하였음)

 

참봉은 별달리 지벌(地閥)과 문식이 있는 자를 택하여 차정하고 임기(50삭)가 차면 6품에 승진 하였다.

 

전우(殿宇)의 수즙비(修葺費)는 규례에 의하여 마련하였고 호세 80결을 면제하기로 획정했으며 삭 능소에 비석을 세웠고 병오(丙午)년에 장예원 으로부터 분부를 받들고 예관 김영래(金永來)를 보내어 전(殿) 능(陵)의 경계를 사방 백보(百步)로 정하였다.

 

경술(庚戌)년(융희4년 1910년) 이후에 제향의 경비를 춘추에 걸쳐 90원씩 관부로부터 의례 지출하였고, 병인(丙寅)년(1926년)에 비로소 축현릉 참봉을 두어 춘분과 추분에 석채례(釋菜禮)로 거행하고 제향의 경비 120원씩 의례 지출했으며 각 능마다 수호인을 두었다.

 

 

2).숭혜전에 봉안된 삼왕 (崇惠殿에 奉安된 三王}

미추왕(味鄒王/ ?~284 신라 13대왕/ 김씨 제1대왕) 구도(仇道)의 아들. 김알지(金閼智)의 7세손(七世孫)

 

문무왕(文武王/ ?~681년) 제30대 왕(김씨 제15대)(재위661~681)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맏아들,

 

경순왕(敬順王/ ?~978년) 제56대 왕(김씨 제38대)(재위927~935) 아버지는 이찬 효종(孝宗)이다. 927년 후백제 견훤(甄萱)이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김부(경순왕) 를 왕으로 세웠다.

 

3).숭혜전지의 계보도 (崇惠殿誌의 系譜圖)

元聖王

-子 禮英

- 子 均貞

- 子 神武王

-子 文聖王

-子 英光

-子 興光

-子 益光

 

 

-子 軾

 

 

-子 吉

 

 

-子 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