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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연구위원회 회의록(제2차) |
일 시 : 2000 7 20 14 25
장 소 : 광산김씨 대종회 회의실
참석위원 : 위원장 김노수 외21인
회 의 개 요 |
노수위원장 개회를 선언한후 위원들 각자가 자기소개를 하다
오늘 바쁘신데도 길수 회장님께서 참석 격려를 해 주시겠다고 오셨다며 인사가 있겠다고 하다.
길수회장 오늘 회의 순서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라고 하다.
노수 위원장 회장의 인사말을 듣고 또 전 과기처 장관이 참석한다고 하였으니 전 과기처 장관의 말씀을 듣고 연구위원글에게 위촉장을 드리기로 회의 순서를 잡았는데 연구위원이 40여분이니 되고 하니 시간 관계로 위촉장은 회의 후 전달하는 것으로 했다.고 하다
길수 회장 더운데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찍이 참석하려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참석치 못했는데 이번에 위원들이 전원 모이게 되어 위촉장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참석했습니다. 1307년 광산현제영시서에 의거 족보를 발간 했고 또 대동보를 다시하고 1910년 충정공 묘지명도 그대로입니다. 묘지명이 발견 되면서 문제가 된 것은 [광양현인이다] 라는 내용이 있어 1939년 장성대보가 나올 때 평장동 연혁을 실은바 있는데 근거는 알수 없습니다.
20여년 전에 모교수의 논문에 광산김씨는 광양김씨에다 같다 부친 것이다 라는 등의 문제가 되어 많은 논의가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고 반박할 필요도 없다고 하여 방치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10여년이 지난후 광산김씨사를 내는데 제세한 언급을 함으로서 일단락 되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다시 2-3년전에 논문이 재론되어 우리도 연구를 해 보자고 하여 회장 수석부회장 등이 많응 연구를 했으나 결국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일부에서 정식으로 위원회를 만들어 연구하자는데 반대했다. 그리하여 내부적으로 연구해보기로 한 것이 지금에 이른 것으로 내용은 그렇습니다.
광양현인은 문헌을 찾아 내는 것이 연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내가 부탁하는 것을 잘 챙겨주셔서 의문점이 안 생기도록 해 주기 부탁합니다. 며 인사를 마치다.
노수 위원장 연구위원회를 한지가 1차 회의가 1월이고 지금이 7월이니 반년이 지났습니다. 이제부터 회의를 하겠습니다. 라고 하다. 오늘의 회의는 광산김씨사 연구위원 전체회의인데 두 번째가 된다. 위원15분이 참석하였고 위임은 창현 영준 수현 영의 광수 위원이고 전화로 나오겠다고 약속하신 분은 진권이시다. 출석사항은 회의록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명단에 정원은 40면인데 20명이 넘으니 성원 된것으로 본다. 그리고 우리는 결의해서 결정짓는 것이 아니고 연구하는 것이다. 성원 관계는 이정도 말씀드리고 회의는 본인이 사회를 하면서 진행 하겠다고 하다.
간단히 경과 말씀을 드리면 전체 회의가 두 번째이고 소위원회는 1차 회의 때 말씀 드린바와 같이 17분인데 3번째이다. 1차 회의 때는 연구자료집을 1집을 만들어 모두 나누어 주었고 2차 회의 때는 인 장윤 연구위원의 연구자료를 책자로 만들어 2집을 배포하고 3차 회의 때는 인 장윤 위원이 제출한 자료를 두한 부회장이 책자로 만들어 3집을 배부했는데 배부한 연구 자료는 중요부분을 발취해 복사하여 현황을 파악하는 준비 자료로 접근 방법이 돼 있다고 본다.
1차 연구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그때 지적된 해결 요망사항을 보면 연구 예산 관계 화보는 위원장이 노력하여 해 달라고 하였는데 2000년도 대종회 사업계획에 광산김씨사 연구예산이 1.000만원이 편성 되어있고 또 하나는 연구를 철저히 하되 타성 교수에게 논문을 발표토록 하자는 요지 였는데 타성의 교수를 물색하다가 한양대 사학과 이완재 교수를 만나 보았다고 하였다. 이 교수는 직제학공파에서 금광동 세세록 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였는데 많은 도움을 준분이며 많은 대담을 나누었으며 내용이 어려운 문제이지만 낙관은 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우리 족보에 흔들림 없는 연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 한가 라고 생각 했다고 위원장은 말하였다.
노수 위원장 순서로 봐서 제1차 회의록을 통과시키는 일인데 회의록은 간단히 개요만 설명 하겠다고 하였다. 연구위원회가 출발이 돼서 위원회 명칭은 충남대학교 선욱 교수의 강력한 주장으로 [광산김씨사 연구위원회] 로 한다는 결정이 있었고 이어서 위원장 부위원장 총무가 결정되고 우현 창현 영준 중수 성식 광수 위원 등이 발언해 주셨다고 하였다. 위원장이 연구계획서를 통과시킨 과정에 이어 영원위원 우현위원의 예산 발언 내용도 설명 되었다.
빠진 것이 있으면 더 첨가 하겠으니 이야기 해달라고 하자 장윤 위원이 그대로 통과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동의를 하고 모두 찬성하자 회의록 통과를 선언하고 회의록 확인은 용서위원님과 영원 위원님이 해 주시라고 하다. 다음은 제1차 총회에서 자료로 드린것을 어떻게 파악하고 계신지 교환 하기로 하되 연구내용을 일단 발표를 하고 일괄해서 질의 응답하는 식으로 하자고 하다.
두한 부위원장 진행 발언을 얻어 회장님이 참석 하셨는데 바쁘시면 가시도록 권유하다.
길수 회장 괞찮다며 끝까지 회의에 참석 하겠다고 하였다.
중수 위원 2차 회의에서 자료가 나왔다고 해서 나왔는데 광양현인을 뒤집을수 있는 자료가 없고 1차 회의 때와 그대로 인 것 같다.
장윤 위원 1.2차 자료 제공자로서 설명을 드리고 싶다.
본 관계 논문을 쓴 분은 김수태 채웅석 두 교수 뿐이며 그 분들의 주장은 금석지문과 고려사에 근거를 두고 어디 어디 人也 라 하는 것을 본관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출신지로 봐야지 본관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교수들도 있다. 혜거국사 비문이 994년에 지어졌고 974년에 죽었으며 최량이라는 사람이 찬을 했는데 그는 속적이 명주 박씨인데 황 현인이라고 하였다. 황려는 여흥이다. 이분은 분명히 명주 박씨라고 했다.
백임지의 지문에는 대흥군인으로 되어 있고 열전에는 람포현인이라 되어 있으나 족보상에는 수원 백씨이다. 김수태 교수는 고려사가 틀렸다고 하는 식인데 다를 교수들은 혜거선사 비문의 해석을 명주 박씨가 맞는데 황려 출신이다. 이렇게 해석한다고 하고 마찬가지로 義字元은 묘지문에 羅州 光陽縣人也로 된 것은 이분은 나주 광양현 출신 이라고 해석을 한다고 하고 윤관 부인의 묘지문 이자겸의 어머니는 통의국 대부인 이었다. (통의는 나주의 고호)
그리고 관향하고 본관에 있어 출자지명 적관 관향을 본관으로 보는 것은 내 견해와 다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즉 본관은 혈족의 분속을 뜻하는 것이니 오늘날 본관이다. 본관은 기거지하고 본관이 일치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그헣지 않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이우성 이기백 박용건)또 최재석 노명우 교수들은 아예 고려 시대에는 혈족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했다. (양인은 양측적 친속집단이 있다고 주장함)
이수건 교수가 토성 연구에서 거론해 가지고 다른 교수들 (최승희 김용성)이 2차 자료로서 논문 사용하는데에 문제가 있다. 반대하는 학자들은 아직 논문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우리 광산김씨사 연구위원회가 조직됐으면 논문 작성을 사학계에 있는분이나 아니면 타성이면 더 좋겠지만 우리 부위원장님이 쓰실 수도 있다. 75년도엔가 고려 양전제 논문이 있는데 사유제를 인정한 내용 이었다. 사유제라는 것은 그 당시 이주의 자유가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건데 고려 시대에는 이주의 자유가 없었다. 토지와 민을 긴박 시켰다. (김수태 채응석 허흥식 이수건)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는 교수들도 많다. 그러니까 이런 반대적인 입장에 있는 교수들께 의뢰 하는 것이 좋겠다. 또 봉부인이 우리 본관의 지명을 말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는지 모른다며 부인들이 본관하고 다르게 봉부인을 받은 내용들을 예로 들면서 설명을 하고 또 고려사 열전에 나오는 조돈의 일가 예와 문익점이 열전에 진주 광성인으로 되어 있어 학자들은 진주문씨 라고 하나 족보에는 남평문씨로 된점 등을 설명하고 왜 그 동안 자료가 하나도 없느냐 그렇게 속단하지 마시고 이렇게 내일이다 하시고 여러분들도 자료를 하나라도 찾아 제시하고자 하는 뜻을 가져야 한다고 하다
영준 위원 삼국유사의 처용가 일부를 소개하고 신라시대의 혼인제도는 방혼제로 모계로 부계로 왔다 갔다 했다. 삼국사기는 정사이고 삼국유사는 야사인데 삼국사기에는 왜곡이 많아 삼국유사가 사실 가치가 더 인정 받을 수도 있다며 예를 들어 설명하다.
그리고 본관과 적관은 달라질 수 있느냐는 것인데 적관은 본관과 상관없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지리지에 보면 지명이 다 들어나 있지 않다. 사건에 의해서 지명이 드러난다. 광야에 대한 연구 포인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 한다. 사료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을 아니해도 머지 않아서 그것이 드러날것으로 생각 한다. 참고 문헌과 소신을 요식 행위로서 결과를 문서로 해서 드리겠다.
인 위원 고려사 열전에 나오는 출자지명과 현재의 본관 여지승람에 나오는 출신 관계 한국 인명대사사전에 나오는 본관이 다 다르다며 이를 설명하고 3세 길에 대한 사적을 보면 막연이 개국공신 으로만 되어 있는데 다행히 중국 사서 [책부원귀] 972권째에 934년에 조공사로 후당에 들어 갔다고 나온다. 934년은 후삼국이 통합되기 이전이다.
그 때에 조공사로 간 것은 그만큼 태조에 신임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 여기에 기록한 자료는 [송대여사자료집] 이라고 5월 20일자 책이 발간 됐다. 또 길자가 모두가 吉字로 나오는데 충정공 묘지에서만 佶字로 나오는데 대해서 설명하고 佶字는 誤字라 하고
문아고 양감의 큰아들 의영이 이정의 묘지명에 의해 나왔고 고려사에도 나와 있음을 설명하고 이어서 송당 선생의 묘지명도 틀렸다는 설명을 하다.
용섭 위원 광양김씨와 광산김씨 문제는 광산김씨 선대 몇 대에 걸쳐 자료상 광양인 또는 광양현인 으로 기록된 분이 있어서 문제가 생겼는데 그것을 그냥 아니라고만 해서는 역사 학자들을 납득 시킬 수 없고 납득 시킬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면 아니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를 제시 하는데는 당시의 자료를 제시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 당시 자료가 나오지 않을 경우 역사학에서는 대세론 으로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하여 사실을 추구하는 연구방법이 있으므로 그 방법을 원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대세는 이 시기는 후삼국시기의 전란기 난세였다는 점이며 이같은 상황에서 광산김씨의 선대들은 그 결과에서 볼 때 어떻게 처신 하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시기의 사실을 이곳 지도를 펴놓고 보면 광산김씨가에서 주장 하는바 본관이 광산 이라는 점이 난세의 정국과 관련하여 설명될 수 있고 그들을 광양인라고 하였을 때도 그것이 광양김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 할수 있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이러한 시각은 광김 문중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대종회 회장님이 생각 하시는 바와도 다름으로 저는 이를 우리 위원회의 위원장님과도 의논을 하고 또 문중의 의견이 어떻겠는지 문의도 하였던바 사실을 사실데로 밝힌 후 그 다음에 가서 의견이 다른 점이 있으면 조정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시어서 그 후 부터는 회의 석상에서 여러 위원님들의 연구를 통해 광김의 선대 사실을 많이 알게 되는 가운데 이에 관련 되는 저의 관점을 조금씩 말씀 드렸고 좀 시간이 걸리겠지만 적당한 시기에는 이를 작은 글로서나마 정리 해야 되겠다고 생각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회장님이 나오셨으므로 제가 생각하는 바 요점을 말씀 드려 볼까 합니다. 문제의 요점은 이 시기에는 후삼국시기의 난세이고 견훤이 광산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의 기치를 올리고 신라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광김의 선대들은 신라 말년에그 시조 흥광공이 이곳 광주의 서일동(후일에 평장동)에 와서 호적을 올리고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신라 말년의 김씨가의 본관 관향은 광주 광산이었으며 김씨가는 신라 김씨로서 광주인 이었던 셈입니다. 물론 견훤이 반기를 들고 백제 부흥을 꾀한 것은 광주이지만 그 지배하는 지역은 광주군 영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호남지역 전체였으며 그 백제 부흥운동을 위한 반란군의 주력부대는 견훤의 직속 부하 군대였지만 옛 백제의 백성들로서 반 신라의식이 강한 사람들 그리고 백제 재건을 바라던 많은 사람들은 다수 이에 호응하고 적극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광주 서일동은 바로 그 반란군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의 핵심부에 위치하고 있는곳 이었습니다. 물론 그 후 10여년 후에 이르러서는 궁예의 부하 장군 왕건이 금성(나주)을 공격 점령함으로서 그 이남 10여개 군현이 궁예 고려의 지배하에 들게되었지만 그러나 그때에도 광주는 견훤이 재건한 백제의 남부지역을 지키는 중요한 보루이었고 왕건과 대치하는 일선지구의 군 주둔지역으로서 변함이 없었습니다.
광주지역이 반군의 거점이 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광김의 선대들이 신라 귀족이라는 사실을 견훤이 알면 살려두지 않을 것이고 그럴 경우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군 견훤에게 적극 협력해야 할 터인데 그렇게 되면 신라의 왕족이 자기 나라에 반역을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왕권쟁탈의 상황이 싫어서 그리고 난세가 올 것을 예견하면서 은거를 하게된 흥광공과 그 일족이 반란군에게 협조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광김 선대들이 택할수 있는 길은 견훤의 본거지 광주지역을 탈출하는 것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탈출은 언제 어떤 방법으로 감행 되었을까 이는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고 여러 기회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제 생각으론 아마도 견훤이 백제 부흥의 기치를 분명히 하고 실질적으로 왕을 자처하게 되었을 때가 그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 됩니다. 이 시기는 吉공이 후에 고려 태조의 사신으로 후당에 갔을 때를 대략 정치적 식견이 원숙한 경지에 이르고 건강도 아직 좋은 연세일수 있는 60세 전후로 보면 아마도 그 탈출은 그의 나이 20세 전후의 정도 또는 청소년 시절이 될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그의 탈출의 방향은 광주에서 그 거리가 되도록 멀고, 그러면서도 신라지역에 지극히 가깝고 교통편이 좋은 곳 그리고 견훤에게 협조하지 않는 분위가 농후한곳 그리고 경주인들도 많이 와서 살고 있는 곳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흥광공이 이때 아직 생존해 있었다면 이러한 판단을 내렸을 것이고 어쩌면 吉공의 父 軾공(신라의 각간)이 그렇게 유도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한 곳이면 광주의 남쪽지방 해안가 그것도 광양지역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 것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을 하는 가운데 광김 선대들도 당분간 이곳에다 호적을 올리고 정착하였을 것으로 추정 됩니다.
왕건이 금성을 점령하고 그 남쪽 40여개 군현을 장악한 후에는 더욱 그러 하였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리고 그러하였다면 그들은 이때 신라 김씨로서 [김모 광양인]으로 불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때는 아직 고려 왕건의 삼한통합이 이루어 지기 훨씬 이전이며, 경주김씨니 광산김씨니 하는 성씨제도 정립되고 있지 않은 때입니다.
후삼국간의 국제관계 국제정세가 광김 족보상에는 구체적으로 연계되거나 잘 반영되고 있지 않지만 당시의 현실은 그러한 정세하에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러한 현실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광김 선대들도 이를 전제로 처신하였다고 보아야 하겠으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그러한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광김 선대들이 광양인으로 불리게 된데는 그럴만한 근거가 있었던것이라고 하겠으며 그렇게 봄으로서 광김 선대들이 고려 태조 왕건의 건국과정과 연계될 수 있었고 길공이 그 태조의 건국과정에서 공을 세우고 정치적으로 중용될 수 있었던 배경도 이해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광주로부터 탈출하지 못하고 견훤의 부하가 되어 그곳에 그대로 살고 있었다면 광김의 선대 역사는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른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광양현에 살고 있는 동안에 광김 선대들은 그 사회적 지위로 보아 신라 경주 쪽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며 고려 왕건과 연계하여 백제의 견훤에 대항하라는 경주쪽 밀지도 응당 받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한 가운데 길공은 정치 경제 군사 해양 등에 관하여 많은 공부를 하면서 청장년기를 동분서주 하였을 것이며, 고려 태조의 건국과정에 [기위지책]을 건의할 수 있는 측근이 됨으로서 태조가 대업을 완성하는데 기여 하였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광산김씨 가에서는 언제 광주로 돌아 왔을까 그것은 당연히 후삼국이 시작된 후 40여년이 지나 왕건이 이를 통합한 후의 어느 시점이 되겠습니다만 그러나 이 경우 그 귀환이 김문 일족이 전원 광주로 귀환한 것은 아니며 새로운 통일국가의 관료가 된 사람들은 개경으로 상경하고 그렇지 못한 문중인은 광주로 귀환하였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관료로서 상경한 일족 이관을 사하였을 경우 광주로 귀향하는 인원이 있었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策공은 그러한 예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같이 광양에서 광주로 귀향한 인원은 다시 이곳에다 호적을 올리고 광주인이 되었을 것이나 그러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광양에 호적을 가지고 광양인으로 살게 되는 일족도 있었으므로 이 시점의 세상에서는 이 金氏家가 광양인인지 광주인인지 그리고 후대에는 광양김씨인지 관산김씨인지 혼동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때에는 고려국가가 본관제, 관향제를 새로히 시행하는 가운데 각 지방 사회 내부에서는 그 구성원 상호간에 이해관계가 얽히고 또 광김의 경우는 얼마전까지 광주지역의 주민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고 있었으므로 호적을 올렸다 하더라도 광주사회 내부에서 불편한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 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영시서]의 마지막 구절에 보이는 사정은 이러한 분위기를 전하는 것이겠습니다.
각 위원 용섭 교수가 밝힌 내용에 대하여 각 위원들이 30여분간 질의 응답식으로 의견 개진을 하다.
노수 위원장 앞으로의 연구대책은 자료를 드렸으니까 연구하시기 바라고 오늘은 이 정도로 마치겠으며 기타 사항을 말씀드리면 7월 22일 고창 화동서원에서 야유회 겸 보학강좌가 있음을 알리고 광산김씨사 연구위원회가 하는 일에 대해서 광산뉴스 2000년 3.4월호에 보도되고 광산김씨 종보 7월 1일자에 내용이 발표되었으며, 김용섭 교수가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되신 것과 참석한 선기 교수 인사 소개를 마치고 이것으로 회의를 마치겠다고 폐회를 선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