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계 연구보고서

본문

3. 연구 계획서

back.gif

 

2000年 1月 22일은 우리 광김 종족에게는 특별한 의의를 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날 광김사연위가 조직되고 그의 연구계획(서)가 최종적으로 정리되어 수행에 옮겨졌기 때문이다. 다음에 이날의 회의 내용과 정리된 연구계획(書)에 대하여 설명하고 이날 있었던 모든 일에 관한 記錄을 보이기로 한다. 연구계획서는 2001年 1月 19日의 광김사연위 제6차 소위원회를 계기로 연구 조직에 변동을 주었다.

 

가. 회의 내용 (2000.1.22.)

2000년 1월 22일(토) 대종회 회의실에서 연구 수행진을 중심으로 열린 연구위원회 첫 회의에서 광주, 부산, 대전,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위임 7명 포함, 32명의 연구위원이 참석하였으며, 전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낸 고려대학교 金始中 교수도 동참하였다.

 

회의는 예정대로 정각 오후 1시부터 시작되어 오후 4시 30분까지 계속되었으며 일동 합동 상견례 교환에 이어 미리 시간적 여유를 두고 각 위원회에 우송된 회의안건(회의개최서한, 연구계획서(안), 연구위원-수행진 명단 등)대로 첫째, 노수 광산김씨 대종회 제1수석 부회장에 의한 회의를 열게 되기까지의 경위 설명 둘째, 광산김씨사 연구위원회 발족, 셋째, 연구계획서(안)의 검토, 넷째, 기타 등의 순으로 노수 제1수석 부회장의 사회하에 진행되었다.

 

회의에 있어서는 각 위원회 미리 우송된 연구계획서(안), 연구위원-수행진 명단 등에 대종중 고문 昌炫(箕), 대종회 부회장 斗漢(洙), 대종회 총무이사 哲泳(永)등세분의 지금까지의 연구내용과 자료를 각각 동의를 얻어 함께 집철해서 ‘先史 硏究資料集’이라 이름 붙여 배부하였으며, 노수 제1수석 부회장이 지참한 논문 등 관계문건 7편을 상관처를 摘示하여 회람시키기도 하였다.

 

경위 설명을 되도록 소상이 하려고 하였지만 시간의 제약을 피할 수 없었다. 경위 설명 후 좌중의 분위기는 사뭇 격렬해졌으며 많은 질문과 지적, 성토와 논박, 불신과 충고, 격려와 충고 등으로 뒤섞였다. 꽤 오래 이 분위기의 연속 끝에 사회자가 묻는 그 대책에 연구위원회 발족 여부는 만장일치하여 ‘發足해야 한다’ 쪽으로 의결되었다.

 

연구 계획서(안)의 검토에도 위원 모든 분이 깊은 성의로 임해 주셨으며, 몇 가지 건설적인 수정 또는 참가할 사항을 빼고는 원안대로 채택하기로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첫째, 명칭을 光山金氏史 硏究委員會로 한다. 둘째, 연구위원회 위원장은 金魯洙로 하고 부위원장도 두어 金昌炫, 金斗漢, 金容燮, 세분으로 한다. 셋째, 연구위원회 (수행진)에 金 仁, 金壯潤, 金 濬 세분을 추가한다. 넷째, 연구위원회(수행진)에 연구소위원회를 두되 위원장단(4명) 족보.금석문. 지리지상의 연구위원(4명)논문상의 연구위원(5명--당일에는 위원장단 등에 위임되었음), 연구자료 입수. 준비. 배포 등 연구위원(3명), 총무(1명 哲泳) 계17명으로 구성하고 연구수행진의 중심적 역할을 하도록 한다.

 

연구계획서(안)중의 예산면에 대해서는 그 확보에 많은 염려가 吐露되었지만 최대 긴축된 그러나 과소한 예산 책정인 것에 전원 의견 일치하였으며 반드시 수행해야할 연구인만큼 또 반드시 확보되어야 할 예산이라고 의견이 만장일치 되었다. 연구위원들은 차년도에 대종회 사업계획 및 예산 책정에 반드시 반영되어야 할 것과 상례적인 사업계획을 크게 수정해서라도 이 예산은 확보되어야 한다거나, 나아가 대종중, 중 소파의 종중, 아니 전 종인이 동참해서 염려토록 해야 할 것이 역설되기도 하였다.

 

많은 논의 끝에 사회자는 성의에 감사하면서, 아니 서로 내 일이고 우리 일이므로 감사할 것이 없다면서 이러한 애로 사항을 다음 대종회 이사회에서 상세히 설명 전달하여 반영하도록 하며, 다른 방법으로도 백방으로 노력할 것을 정하면서 폐회 여부를 묻고, 폐회하였다. 폐회하기 얼마 전에 金始中 전 장관은 다른 회의 참석을 위해 자리를 떴지만 자기도 여러가지 연구사업에 기여할 것과 발족 때 우선 100만원을 헌금하겠다고 하였다.

 

이 날 회의에서는 昌炫, 壯潤, 永俊, 尙植, 永元, 光(永)秀, 重洙, 善源, 善昱, 容儏, 斗漢, 哲泳 씨 등이 많은 발언을 해주셨다. 이번 연구위원회 발족을 계기로 많은 유능한 일가들과 만나고 알게 되었으며 참으로 진지하고 성실한 연구가 학구적으로 수행되어 우리 문중 뿐만 아니라 다른 姓氏, 아니 나아가 우리나라 氏族文化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였다.

 

나. 연구계획(서)

최종 연구계획(서)는 2000년 1월 22일 회의자료로 배포한 연구계획서을 상기 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정한 갓이다. 정리된 최종 광산김씨사 연구위원회 조직만을 이곳에 모이기로 한다. 광산김씨사 연구위원회는 연구위원들의 사정에 따라 그 조직에 변동이 있었으나 여러 연구의 중심을 이루었다. 金昌炫(箕 문숙공파)씨는 연구에 많은 노력을 하시다가 2000년 10월 20일 작고하셨다. 위원들은 물심양면에서 많은 회생을 감수해야 했으나 연구 결과는 객관성을 유지하도록 절대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연구 출발 시부터 강조되었다.

 

다. 회의 유관 기록물 (2000년 1월 22일)

다음에 이날 광김사연구위 제1차 전체 회의 유관 기록물인 참석의뢰공문, 연구계획서(안), 광산김씨선사 연구위원회 (수행진)명단, 이날 회의의 회의록등을 차례로 보인다. 이때의 연구계획서(안)은 회의때 토의에 의해 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