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계 연구보고서

본문

2. 연구 위원회의 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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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光山金氏 종족은 大宗中 규약 전문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시조 신라왕자 諱 興光公의 연익의 홍모를 계승하여 천지쟁영하고 萬華含芳으로 歷年 千載에 임하는 오늘 報本의 지성과 목족의 대의에 입각하여 宗族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各人의 실력배양과 위공봉사 국가사회에 공헌함으로써 영광을 선조에게 돌릴 것을 결의하고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신조로 살아가고 있는 光金 門中에 어느 날 크나큰 파문을 주는 듯한 일이 생겼다. 그 일과 그에 대한 門中의 대책은 우리 門中은 물론이고 여러 後來者를 위하여 매우 큰 의의를 지니고 있으므로 좀 소상히 기술하고져 한다.

 

1998년 2월 10일, 필자는 우리 사온직장공파 金榮鎬씨의 청을 받고 점심을 함께하며 기상천외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내용인즉 ‘당시 영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수건씨의 1975년도에서부터 시작하여 5년여에 걸쳐 시행된 연구 및 그 보고서와 이들을 인용한 국내 사학계의 많은 연구보고서들의 본의는 아니지만 우리 門中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라는 것이었다. 그 내용을 몇 마디로 간추리면 光山金氏의 3世~8世 祖上은 光陽金氏의 祖上인데 이분들이 有名한 분들이어서 自己들의 祖上이라고 윤색하고 있다.’ 라는 것이 이수건의 연구내용이고 ‘이것을 그대로 인용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필자는 처음에는 이러한 말들을 否定만 하였지만 3일 후인 2월, 13일, 김영호씨로부터 동상건 유관 논문과 자료를 대입 복사하여 정독한 후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건에 접한 광김 종인으로써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겠지만 당시 대종회 제1수석 부회장에 있는 사람으로서 더욱 경악과 그 대책에의 책임을 느꼈으며 나름대로 논문의 정독과 대책 검토를 되풀이 하면서 10여일을 보냈다.

 

同年 2월 24일 김길수 대종회 회장과 만나서 동상건에 대하여 브리핑한즉, 자기는 이미 1997년 말경 김철영(司醞直長公派)씨로부터 관계 논문을 받아보고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의 토의를 위해 회장, 상임고문의 모임을 가질 것을 제의하자 3일후의 종보위원회(98,2,27) 거론하자고 허였다.(아, 회장은 이 중대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구나! 생각하면서)하루 뒤인 2월 25일, 필자는 김희수, 김홍수 상임고문 등에게 同上件 논문의 일부를 복사, 우송하였다.

 

2월 27일이 되었지만 종보위원회만 속행하고 동상 논문 건에 대하서는 취급이 없었다. 논문 건이 만시지탄감은 있었으나 1998년 3월 9일 대종회 회의실에서 다른 案件으로 열린 전국 시도 종친회 회장이 참석하는 회장단 회의에 보고, 상정케 되어 열띤 토론 끝에 연구하기로 만장일치로 의결하고 그 실행은 회장, 수석부회장단에 위임되었으나 그 후도 계속하여 그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수석부회장들(김노수, 김용호)은 사안이 극히 중요하고 또 전국 회장단회의에서 회장단에 그의 연구가 만장일치로 위임된 것임에 주의하여 책임을 다하려, 기회가 있을 때나 또는 만들어서 회장에게 위임사항의 실천을 촉구하였지만 전혀 수리되지 않았다. 특히 1998년 3월 9일의 전국 회장단회의 후, 4월 26일의 대종회 총회,

 

동년 6월 9일 仁川 송도에서의 全國 會長團會議, 同年 8월 18~19일 충남보령에서 보학 강좌및 야유회등과 같은 큰 행사가 있었으니 이들 행사쯤이면 그 어느 것에서도 3월 9일자 全國 會長團 會議  결의 사항의 실천 여부에 대하여 종인 누구에 의해서라도, 특히 서울 지방 할 것 없이 종회 임원이라면 그 누구에 의해서라도 “어떻게 되었는가?” 하고 질문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딱 한 분이 있었다. 慶南 종친회의 金麟鉉씨였다. 보령에서의 譜學 講座 때, “회장은 어찌하여 3월 9일 會長團 會議  決議 事項에 대해서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느냐?”라는 질문이 필자한테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의 연속 中에서 重大한 사명을 지시, 위임받은 대종회 수석부회장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또 노력해보고 안되면 책임을 느끼고 그 자리를 그만 둘 것 아닙니까! 이러한 분위기에서 1998년 9월 21일(月) 의 98年度 第2次 大宗會 理事會가 도래했다. 회의의 기타 토론 단계에서 필자는, ‘이수건 논문과 광김 선계’에 대한 지금까지의 회장, 수석부회장, 회장단 회의 구성원의 행적을 설명하고 앞으로의 조치, 즉 ‘강력한 연구 주장’을 추구하였다. 다음 표1는 회의 당일 참석한 임원들에게 배포된 것으로 참석하신 분들께서는 바로 상기되실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시간은 가고 환경은 변해가고 있는데 光金 先系 硏究의 수행이 도외시 되고 있을 때 1999年 8月 30日의 대종회 이사회에서의 在敏 당시 인천광역시 종친회장의 회장책임 추궁에 이어진 선계연구 촉구 발의와 그의 만장일치 찬성으로, ‘광산김씨 선계사는 서둘러 연구해야 하며 회장은 연구계획서를 다음 이사회에 정식으로 제출토록’ 되었으며 이에 따라 1999年 9月 7日(火) 6:00PM 대종회 회의실에서 金弘洙 상임고문, 회장, 1~2수석부회장, 부회장4명(金斗漢.金哲洙.金建中.金炅中), 사무국장 등 計9名이 회의를 얼어, ‘金魯洙 제1수석부회장을 위원장으로 하여 광산김씨 선계연구 위원회를 발족하게 하고 그 조직및 연구수행 일체를 위임하여 1999年도 예산은 잠정적으로 500만원으로 한다.’라고 결정하였다.

 

이 결정의 수행을 위해 金魯洙 제1수석 부회장은 연구 위촉이 예상되는 많은 일가분들과 일일이 면담 또는 전화 통화를 거쳐 연구참여 동의를 얻어 연구진을 조직하고, 여기에 잠정적 예산안을 부가해서 연구계획서(안)을 1999年 10月 말일 한 작성, 몇 분들과의 자문 및 심의를 1999年 11月 24日 4:30PM 大宗會 會議室에서 거쳐, 1999年 12月 16日(木) 6:00PM 열린 大宗會 理事會議 때 연구계획서(안)의 배포와 함께 부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연구비 예산확보 문제, 참여 연구원, 연구지원문제 등에 대해서 質疑가 있어서 說明되고, 2000年 1月 中 있을 豫定인 硏究執行陣을 中心으로 한 硏究 委員會 첫 회의의 결과를 반영, 조정키로 하였다.

 

이 연구위원회는 2000年 1月 22日(土)에 열렸으며 이때를 계기로 그렇게도 어렵게  그리고 오랜만에 ‘광산김씨사 연구위원회’란 명칭으로 광김 선계 연구를 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글에서 필요하면 ‘光山金氏史 硏究委員會‘를 ‘光金史硏委’로 약(略)하기로 한다. 이 회의는 광산김씨사 연구위원회의 제1차 전체 회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