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계 연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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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관향 취득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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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섭 박사의 논문 중에서

상략- 광산김씨가의 광산지역 정착 광산 관향 취득 과정은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으며 지금까지의 자료를 통해서 보는 한 그것은 다섯 차례의 이전 이라고 하는 우여곡절을 거친 후에야 겨우 얻을 수 있었던 험난한 과정 이였다.

 

제1기

시조 신라왕자 김흥광이 신라 말년의 왕위쟁탈전 난세를 피하여 경주에서 무주로 이전 복거함으로서 무주인 광산인이 되는 시기

 

제2기

견훤이 무주지역을 근거로 후백제를 건국함으로서 김씨가가 그곳에 살기 어렵게 되자 견훤의 지배세력이 아직 확고하게 확립되기 전에 광양을 거쳐 금산(나주)지역으로 탈출 여기에 적을 올림으로서 광양인 금산인이 되는 시기

 

제3기

왕건의 후삼국 통합이 있은 후 김씨가의 관향이 고려국가의 이른바 본관제에 의한 광주 광산으로 복귀하고 김씨가는 광주인 광산인이 되는 시기였다. 그리고 이 때에는 김씨가의 제3세 길이 왕건의 후삼국 통합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공신이 됨으로써 그 후손들이 세세대대로 귀족 관료가 되고 인주 인으로서의 이씨가와 누대에 걸쳐 혼인을 함으로써 이 시기의 이른바 문벌 귀족의 일원이 되고 있는 김씨 선대사에 있어서의 전성의 시기이기도 했다.

 

제4기

김씨가의 관향이 광주에서 광양으로 처벌 이향되고 그들은 광양인이 되는 시기였다. 이는 김씨가의 제8세 김의영이 이자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한반도 南裔로 유배되고 그 처자식은 양계의 주진 노비로 정락하며 그 직계 가족도 처벌 되는 가운데 김의영이 유배지에서 사면 해배 되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양이 과정을 거치는데 그치는 것이어서 그 관향이 광양으로 이향케 된 것이었다.

 

이 때의 이 사건은 국왕권을 중심으로 집권 관료체제의 강화를 지향하는 정치세력이 발호하는 문벌 귀족을 중심한 정치세력을 숙청하는 정변이었므로 김씨가는 그 희생이 되고 따라서 김씨가 특히 김의영계는 가문 몰락의 위기에 몰리고 있는 시기였다.

 

제5기

이 시기는 무신란을 계기로 김의원 계에는 김광중이 살해되는 희생이 따르기도 하였으나 김씨가의 제11세이고 김의영계의 증손이 되는 김원의가 掖庭局의 우중금 (졸병)으로서 난세속에 명종을 기민하게 잘 시종하고 호위함으로써 그 보상으로 가문을 재건하고, 그 관향을 다시 광주 광산으로 귀환케 하며 김씨가를 다시 광주인 광산인이 되게 한 시기였다.

 

이렇게 하여 비로서 김씨가의 관향은 광주 광산지역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되고 시조공이 복거 하였던 무주 광주지역을 김씨가의 본관 지역으로 즉 광산김씨가 성립 할 수 있는 지역으로 재확인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