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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료의 분석 |
1) 위의 자료는 왕자대의 위치 사정(査定)에 필요한 전거를 편술 연대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2) 방향과 거리표시에 있어 ‘여지도서’ 및 ‘증보문헌비고’에는 광주 관아(官衙)로부터 西쪽 45리에 있다 하였고, ‘호남읍지’ 및 ‘광주읍지’에는 西쪽 40리에 있다 하였으며, ‘대동지지’에는 西南쪽 45리에 있다 하여 방향과 거리가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져 있다. 이는 같은 지점을 두고 방향이 다르게 기록된 것은 광주를 가로질러 東北쪽에서 西南쪽으로 흐르는 칠천(漆川)의 조운수로(漕運水路)를 따라 하류 쪽에 西倉이 설치되고, 상류 쪽에는 東倉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서남쪽을 서쪽으로 간주될 수도 있었다 하겠으며, 거리가 다르게 기록된 것은 거리를 실측(實測)하지 않고 추정하여 기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차로 보아진다.
3) 위 전거문헌의 밑줄부분에서 보듯이 ‘여지도서’의 ‘古跡’ 조에「왕자대는‘광주의 서쪽 45리 大江 위에 있다.」하였으니 여기서 ’大江‘이란 담양의 추월산에서 발원하여 죽록천과 창강을 거쳐 광주의 칠천과 극락강을 지나 나주의 사호강으로 이어지는 지금의 영산강 본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하며, 따라서 왕자대는 영산강 본류의 45리지점 연변에 위치한다고 보아진다.
아울러서 ‘여지도서’ 및 ‘호남읍지’의 광주 ‘山川’ 조에도「남평천은… 왕자대 밑에 이르러 극낙강과 合流한다.’」하였으니 역시 영산강 본류와 남평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大江 윗 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연경재전집’에서도 사호강을 설명하면서「… 극락평에서 극락강이 되어 왕자대에 이르러 지석강이 동쪽으로부터 와서 만난다.」…「지석강은 … 서북쪽 왕자대에 이르러 사호강으로 들어온다.」라고 하여 왕자대의 위치가 극락강(영산강)과 지석강(남평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서북쪽 언저리에 있음을 짐작케 한다.
또 ‘대동지지’의 나주 ‘山水’ 조에도「사명강은 남평의 지석강과 광주의 황룡천이 왕자대 밑에서 합하여…」라고 하여 두 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위쪽에 왕자대가 있음을 적시하고 있다.
4) 그러나 ‘대동여지도’에서는 왕자대의 위치를 ‘月城里’ 쪽으로 比定하여 표기하고 있는바, 이는 필시 ‘연경재전집’의 ‘사호강’을 설명하는 구절 중에서 「지석강은… 왕자대에서 상류쪽으로 大川이 둘이니, 광주 무등산 도천이 능주 관아 앞으로 들어오고, 남평 덕룡산의 魚川이 왕자대의 밑으로 들어온다.」라는 구절이 왕자대의 위치를 월성리로 비정하는데 영향을 준 듯 하며, 역시 ‘대동지지’의 남평 ‘山水’ 조에도「지석강은 … 서쪽으로 흘러 왕자대에 이르러 왼쪽으로 어천을 지나 나주 경계에 이르러 영산강 상류가 된다.」라고 하여 ‘연경재전집’의 의 구절이 인용된듯하다.
5) 그리고 왕조대의 위치는 ‘대동여지도’에 광주의 서남쪽 서창(西倉) 근처 백마산(현 서구 세하동)으로 표시되어져 있고 ‘여지도서’ 및 ‘대동지지’에 의하면 「광주의 서쪽 30리에 있으며, 고려태조가 진중에 머물던곳」이라 하여 圖와 書가 일치하니 이는 재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6) 그러면 위의 여러문헌에서 지칭하는 왕자대의 위치는 과연 어디일까?도상(圖上)으로 추정(推定)하여보면 ①우선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광주 남구의 月城洞 남측의 구릉지대(표고 59.1m)와, ②나주 노안면 학산 1구의 봉호마을 뒤쪽의 龍山(표고 51.9m)지역, ③그리고 학산 4구의 동산마을 뒤쪽의 伏岩(표고37m)일대 등, 세 곳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위의 세 곳 중 ①의 月城쪽은 지난 2001년 10월 18일에 광산김씨사 연구위원회에서 일차 탐방 하였으나 아무런 흔적도 확인하지 못한 바 있다.1) 당시 방문팀은 金魯洙 위원장과 斗漢 부위원장․祐鉉․永俊 위원, 그리고 필자 5人이었으며, 광주에서 대종중 善述 전곡유사와 문민공파의 重采 도유사가 동행하였고, 향토사학자 金井浩씨의 안내로 14時 30分 광주역을 출발하여 南平 경계인 현 광주시 남구 월성리(洞) 일대를 탐방하였는바, 지형적으로는 可히 요새를 이룰만하다고 여겨졌다. 마을 일원은 丘陵을 이루어 마치 거북 등을 연상케 하였으며, 마을 前面과 左右三面은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모두 논밭이 되어 있었으나, 예전에는 강물이 차 있었으므로 마치 거북 한 마리가 江心을 향하여 뻗어나가 웅크린 뜻 한 느낌을 주는 형국으로, 마을의 앞면인 거북머리 쪽은 지형이 돌기하여 봉우리(표고:59.1m)를 이루었는데 앞쪽은 절벽(斷崖)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그 밑은 ‘배다리(舟橋)’가 있는 나루터였다는 것이다. 만일 城을 쌓았었다면 돌이 없으므로 군데군데 취약지역만 토성으로 보완하였었을 것이나 지금은 모두 개간되어 흔적이 있을 수 없었다. 귀로에 車中에서 金井浩씨의 설명에 의하면, “나주시 노안면 龍山에도 古跡이 문헌으로 확인되었는데, 王祖臺로 추정된다”하였고, “대동여지도는 實測하여 표시 한 것이 아니므로 실제와는 차이가 많다”는 말도 하였다. 돌아와서 龍山의 소재를 확인하여 본바, 月城里 西쪽 3㎞ 지점인 大江上에 ‘용산’이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王祖臺의 위치(現 광주시 서구 세하동 白馬山으로 추정됨)와 용산과는 8㎞의 상거가 되니 “이를 王祖臺로 추정 한다” 는 견해에 대하여 이는 수긍하기 어렵고, 오히려 ‘王子臺’였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여지도서』에는「在州西四十五里 大江上 俗傳三國時 王子留陣之所 尙有築城基址」라 하였으니 ‘大江上’이라면, 용산 부근이라야 기록상으로 합치되기 때문이다. 아울러서 1925년에 제작된 옛 지도를 확인한바 月城里는 영산강의 支流인 南平川이 다시 나누어진 샛강의 上邊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샛강이 모두 개간되어 없어졌으니 ‘大江’이라는 용어와는 부합되지 않을 뿐 아니라 만일 하류 쪽에서 적이 수로를 봉쇄한다면 대패할 수도 있는 전략상 아주 불리한 위치임을 알게 되었다.
7) 그러면 ②의 ‘용산’쪽을 살펴보자, 이곳은 역사적으로 그 유래가 깊은 곳이다.
<삼국사기 권36, 지리지>에 의하면,「무주의 용산현은 본래 백제의 복룡현을 경덕왕이 개명한 것인데, 이제 옛 이름(伏龍)으로 돌렸다.」하였고,
<고려사 권57 지리지>에는,「나주목의 복룡현은 본래 백제의 복룡현(일명:배룡)을 신라의 경덕왕이 용산으로 개명하여 무주의 속현으로 삼았는데, 고려 때 옛 이름으로 돌려 나주에 내속시켰다.」하였고,
<세종실록 권151 지리지>에도,「나주목의 복룡현은 본래 백제의 복룡현을 신라가 ‘용산’으로 바꾸어 무주의 속현으로 삼았는데, 고려가 복룡현으로 다시 돌려 나주에 래속 시켰다.」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5 羅州牧 ‘古跡’ 조>에도,「복룡폐현은 나주의 북쪽 30리에 있으며, 본래 백제의 복룡현으로, 한편 ‘배룡’ 이라고도하며, 신라가 ‘용산’으로 바꾸어 무주의 속현으로 삼았는데, 고려가 옛 이름으로 돌려 나주에 내속시키니 조선에서도 그대로 하였다.」하였고,
<대동지지 권12 羅州 ‘古邑’ 조>에도,「복룡은 나주의 북 30리에 있으며, 본래 백제의 古麻山으로 唐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龍山으로 바꾸었는데,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무주 속현이 되었다가, 고려태조 23년(940년)에 伏龍으로 바꾸고, 현종 9년(1018년) 나주에 來屬되었다.」하였고, 同 ‘山水’ 조에는「복룡산은 북쪽 34리에 있으며 伏龍古縣이다.」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의 지도에서는 복룡산은 확인되지 않는다.
8) 위와 같이 용산은 모든 지리서에 등장하고 있는 바, 거리를 측정하여 보면 광주↔용산 : 17km(42.5리), 나주↔복용 : 12km(30리), 나주↔용상 : 8km(20리), 용산↔복용은 4km(10리)거리로 두 마을은 같은 현에 속하여 있으면서도 광주와 나주의 위상(邑號)이 높아지거나 낮아짐에 따라 그 관할이 바뀌면서 縣의 명칭도 용산현 또는 복용현으로 바뀌고 현청 소재지로서의 마을 위상도 달라져왔는데, 지금은 용산은 나주의 노안면에 속하고, 복용은 광주의 광산구에 속하여 완전히 분리되었다.
용산이 현청 소재지로서의 위상이 높았던 시기는 신라통일 후 경덕왕 16년에 전국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부터였고, 고려태조 23년에 고려가 후삼국을 통합 후 주․부․군․현의 칭호를 바꾸면서 다시 복룡현이 되었으니 기록으로 보면 통일신라시대에 183년간(757~940)은 용산현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9) 지형을 살펴보면 용산은 大江인 영산강 본류의 연변에 위치하여 수로이동이 편리하고, 지대가 강변에 연접하여 조운과 접안이 용의하며, 야산이 강변에 연접하고 주변의 시야가 광활하여 초소경계에도 용의하니 군사목적으로는 대단한 요충지라 할 수 있다.
10) 다음은 ③의 학산 4구의 동산마을 뒤쪽의 伏岩 일대를 살펴보자, 이곳도 지도상으로 보면 영산강과 남평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영산강 본류 변에 위치하여 수로로 접근성이 용의하고, 표고 37m의 암반이 있으며, 복암과 용산 사이에는 영산강 연변을 따라 배후능선이 형성되어 있어 군사목적으로는 매우 이용가치가 높은 곳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나주목 ‘산천’ 조에 의하면, 「복암은 ‘광탄’의 서쪽 언덕에 있으며, 고을 사람들이 놀고 즐기는 곳」으로 소개되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군사목적상의 主陣地로는 별로 이용되지 못하고 신라시대에는 가까운 용산 아문의 부수 지역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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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방문팀은 金魯洙 위원장과 斗漢 부위원장․祐鉉․永俊 위원, 그리고 필자 5人이었으며, 광주에서 대종중 善述 전곡유사와 문민공파의 重采 도유사가 동행하였고, 향토사학자 金井浩씨의 안내로 14時 30分 광주역을 출발하여 南平 경계인 현 광주시 남구 월성리(洞) 일대를 탐방하였는바, 지형적으로는 可히 요새를 이룰만하다고 여겨졌다. 마을 일원은 丘陵을 이루어 마치 거북 등을 연상케 하였으며, 마을 前面과 左右三面은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모두 논밭이 되어 있었으나, 예전에는 강물이 차 있었으므로 마치 거북 한 마리가 江心을 향하여 뻗어나가 웅크린 뜻 한 느낌을 주는 형국으로, 마을의 앞면인 거북머리 쪽은 지형이 돌기하여 봉우리(표고:59.1m)를 이루었는데 앞쪽은 절벽(斷崖)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그 밑은 ‘배다리(舟橋)’가 있는 나루터였다는 것이다. 만일 城을 쌓았었다면 돌이 없으므로 군데군데 취약지역만 토성으로 보완하였었을 것이나 지금은 모두 개간되어 흔적이 있을 수 없었다. 귀로에 車中에서 金井浩씨의 설명에 의하면, “나주시 노안면 龍山에도 古跡이 문헌으로 확인되었는데, 王祖臺로 추정된다”하였고, “대동여지도는 實測하여 표시 한 것이 아니므로 실제와는 차이가 많다”는 말도 하였다. 돌아와서 龍山의 소재를 확인하여 본바, 月城里 西쪽 3㎞ 지점인 大江上에 ‘용산’이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王祖臺의 위치(現 광주시 서구 세하동 白馬山으로 추정됨)와 용산과는 8㎞의 상거가 되니 “이를 王祖臺로 추정 한다” 는 견해에 대하여 이는 수긍하기 어렵고, 오히려 ‘王子臺’였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여지도서』에는「在州西四十五里 大江上 俗傳三國時 王子留陣之所 尙有築城基址」라 하였으니 ‘大江上’이라면, 용산 부근이라야 기록상으로 합치되기 때문이다. 아울러서 1925년에 제작된 옛 지도를 확인한바 月城里는 영산강의 支流인 南平川이 다시 나누어진 샛강의 上邊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샛강이 모두 개간되어 없어졌으니 ‘大江’이라는 용어와는 부합되지 않을 뿐 아니라 만일 하류 쪽에서 적이 수로를 봉쇄한다면 대패할 수도 있는 전략상 아주 불리한 위치임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