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대 왕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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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결어(結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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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광(金興光) 은 신라 제45대 신무왕 셋째아들로 서기 825년경 서라벌(현 경주)에서 출생하여 837년 5월, 가족과 함께 청해진(완도)으로 피난나와 살았으며 838년 12월 신무왕이 김명(민애왕)을 치기 위해 유진했던 처소인 현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용산마을로 841년 11월 장보고 가 피살된 이후, 옮겨와 일시 머물다,

 

왕실에서 사급하여 여러 시설을 축조해준 무주 서일동(광주 평장동)으로 가서 둔거(遁居)하던 중, 서기889~892년 견훤이 무주를 습취(襲取)하여 자립(自立)하므로 견훤의 세력권을 벗어나 父王인 신무왕의 유진지처요, 왕자공이 전에 유진했던 이곳으로 돌아와 살았기 때문에 여지도서, 호남읍지. 광주읍지. 대동지지, 증보문헌비고 등에서 왕자대는 후삼국 때 왕자가 유진했던 곳이라 하였으며, 이로인해 왕자대 라 호칭하게 되었음을 고찰하였다.

 

생갑을 추고하면 신무왕의 장자 문성왕이 821년생이므로, (3子)김흥광: 825경생,/ 김식: 855년경생 / 김길: 885년경생/ 김준: 915년경생/으로 추고되는바, 936년 9월, 후백제의 신검이 항복한 당시에는 왕자공은 이미 고인(故人)이 되었으며 왕자공 손 김길, 증손 김준 은 상경종사(上京從仕)하였을 것으로 추고한다.

 

왕자공의 손자 김길(金吉)은 왕건이 나주에 머물다 개경으로 떠날 때 함께 상경했을 것이요, 934년, 재추(宰樞)의 지위에 올라 고려국의 사신(使臣)으로 후당(後唐)에 가는 등 고려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삼한벽상공신(開國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 사공(司空)을 제수(除授)받은 것으로 이해한다.[註 1]

 

王子公의 6世孫 평장사(平章事) 김정준(金廷俊)의 딸(李資謙 母)이 통의국대부인(通義國大夫人)으로 봉작(封爵)되었으니 작호(爵號) 통의(通義)는 나주(羅州)의 옛 이름(古號)(註 2)이다.

 

*왕자대(王子臺)가있는 나주(羅州)지역은 후삼국시(後三國時), 왕건(王建)을 매개(媒介)로 하여 태봉(泰封)에 귀부(歸附)했으니 나주지역은 나주(羅州), 영암(靈巖), 영광(靈光), 함평(咸平), 무안(務安), 진도(珍島), 완도(莞島), 해남(海南), 강진(康津), 장흥(長興) 등 전남(全南)의 서남해안 지역(西南海岸 地域)과 전북(全北)의 고창 지역(高敞地域)을 포함한다.[註 3]

 

왕자대(王子臺)는 후삼국(後三國) 때 왕자 김흥광(金興光)이 유진(留陣)했던 유지(遺址)였으므로 후세 문헌(文獻)에 ‘삼국시 왕자유진지소<三國時 王子留陳地所>’라 기록하고 있다.

 

 

[註 1] 册府元龜 卷九百七十二 外臣部 十七 朝貢 五

(後唐)廢帝 淸泰元年(934) 八月, 靑州言 高麗入貢使 金吉 船至岸北,『册府元龜』는 北宋 眞宗 2년(1005) 9월, 王欽若(962-1025), 知制誥 楊億(974-1020) 등 15인에게 명해서 이 책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1005년에 편집에 착수, 1013년에 완성한 1,000권으로 된 중국역사서 이다.

金吉에 관한 기록은 金石誌文과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吳元卿묘지, 金光載묘지, 朴允文妻金氏묘지, 高麗史 金台鉉전, 大東韻府群玉, 光州邑誌 참조)

[註 2] 新增東國輿地勝覽 羅州 참조

[註 3] 三國史記, 全羅南道誌,, 光州市史, 順天市史,  鄭淸柱의 ‘新羅末 高麗初 豪族硏究“1996, 申虎澈의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199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