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대 왕조대

본문

3. 왕자대는 후삼국 때 왕자 김흥광 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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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대(王子臺)에 관한 기록은 여러 문헌에 평장동과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신라 의 신무왕(神武王)이 미력(微力)한 때 화(禍)를 피하여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 에게로 가서 의탁(依託)하고 무주도독(武州都督) 김양(金陽) 과 더불어 함께 기병(起兵)을 모의(謀議)하여 환란(患亂)을 다스리고 천하(天下)를 평정(誅亂反正)하니 여기가 곧 신무왕(神武王)이 진중(陣中)에 머물던 곳이다’하였다.

 

이 유지는(遺址)는 신라(新羅) 때 신무왕(神武王)이 청해진(淸海鎭=莞島)의 장보고(張保皐) 의 도움으로 서기 838년 12월에 김민주(金敏周)의 왕군(王軍)를 격파한 철야현(鐵也縣=南平)과 가까운 곳으로 김우징(金祐徵)은 여기에 유진(留陳)하여 838년 12월부터 閏 1월을 포함하여 다음 해 4月에 즉위(卽位)하기까지 유진(留陣)하였다가 경주(慶州)로 떠날 때 그의 3子 김흥광(金興光)을 청해진(淸海鎭)에 남겨두게 되니[註 1] 그 '유진지처(留陣之處) -뒤에 王子臺로 改稱된 곳 - 는 신라왕실로 부터 김흥광에게 사급(賜給)되어 관리는 왕자공(王子公)이 맡게 되었다고 여기며, 841년 11월 장보고(張保皐)가 피살[註 2]된 후, 851년 2월, 청해진(淸海鎭)을 없에고 그곳 주민을 벽골군(碧骨郡=全北金堤)으로 사천(徙遷)[註 3]하던 어느 때에 왕자공은 청해진에서 이곳으로 임시 옮겨와 머물면서 무주 서일동(西一洞)일대를 -후에 平章洞이라 함- 왕실로부터 사급(賜給)받아 왕실의 지원으로 그 곳에 여러 시설[註 4]을 건조하며 터전을 마련했던 것으로 여긴다.

 

문성왕 17년인 855년 4월에 왕의 근친들이 참여하여 만든 창림사 무구정탑(昌林寺 無垢淨塔) 원기(願記)에 의하면 감수조사(監修造使)를 맡은 왕의 종숙(從叔) 김계종(金繼宗)은 당시 관직이 행 무주장리(行 武州長史)였는바 장리(長吏)는 각 州에 1명씩 파견되어 행정을 돕는 역할을 하던 직책이었다. 또 탑의 원기(願記)를 지은 김립지(金立之)[註 5]는 왕의 근친으로 문한직(文翰職)인 한림랑(翰林郞)이었는데 추성군(秋城郡=담양군)태수(太守)[註 6]직에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왕자공이 둔거하던 서일동(평장동)시설은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축조되었을 것으로 추고한다.

 

당시 서라벌(경주)사정은 김흥광의 長兄 경응(慶膺)이 839년 7월, 신무왕 서거 후 왕이 되어 아버지의 즉위를 도운 세력을 우대, 장보고(張保皐)를 진해장군(鎭海將軍), 예징(禮徵)을 상대등(上大等), 김양(金陽)을 병부령(兵部令)에 임명했으나, 이들 귀족세력은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여 모반사건이 빈번하였다.

 

841년 일길찬(一吉飡) 홍필(弘弼)과 장보고의 반란, 847년 이찬(伊飡) 양순(良順)과 파진찬(波珍飡) 흥종(興宗)의 반란, 849년 이찬 김식(金式)과 대흔(大昕)의 반역 등, 모반(謀叛)이 계속되다가, 857년 아버지의 이복동생인 숙부(叔父) 의정(誼靖)에게 왕위(王位)를 계승한다는 유조(遺詔)를 내리고 서거 후,

 

숙부 헌안왕(의정)은 김균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희강왕(제륭) 아들인 김계명(金啓明)의 아들, 응렴(膺廉=경문왕)을 860년 4월에 사위로 맞아 861년에 졸한 후, 왕위가 응렴(경문왕)을 거쳐 그의 자녀들인 헌강왕(憲康王), 정강왕(定康王), 진성여왕(眞聖女王) 으로 이어졌는데 이때도 반역이 계속되어,

 

866년 10월, 이찬 윤흥(允興)이 아우 숙흥(叔興), 계흥(季興)과 반역, 868년 1월, 이찬 김예(金銳)[註 7], 김현(金鉉) 등의 반역, 874년 5월, 이찬 근종(近宗)의 반역, 879년 6월, 일길찬 신홍(信弘)의 반역, 887년 이찬 김요(金蕘)의 반역 등이 계속되던 중, 889년(진성왕 3) 나라 안의 모든 주군에서 공물과 부세를 보내지 않아, 창고가 텅텅 비어 나라 재정이 궁핍하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독촉하니 곳곳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사벌주(尙州)를 근거지로한 원종(元宗), 애노(哀奴)의 반란, 서남쪽의 적고적(赤袴賊)등의 반란 등, 전국 각지에서 농민을 포함한 지방세력이 봉기하였다. 이때 일어난 농민봉기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이 틈을 타 지방의 세력가(豪族)들은 농민들을 규합하여 중앙정부에 대항하였는데, 북원(原州)의 양길(良吉=梁吉), 철원(鐵原)의 궁예(弓裔), 사불성(沙弗城=尙州)의 아자개, 무주의 견훤(甄萱) 등이 일어났다.

 

897년(진성왕11) 6월, 진성왕이 좌우 신하에게 이르기를  

“근년 이래 백성이 곤궁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니, 이는 나의 부덕한 탓이다. 어진 이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은 결정되었다.”고 하고, 태자 요(헌강왕 子)에게 왕위를 넘겨 주었다.  

 

종국에는 견훤이 세운 후백제와 궁예가 세운 태봉, 그리고 신라가 각축전을 벌이게 되어 이른바 후삼국시대가 되었다. 이 혼란기에 견훤이 광주를 습취, 후백제를 건국하니 왕자 김흥광은 경주로 갈 수가 없었을 것이요, 신라왕자의 신분으로 반적 견훤의 세력 아래 편입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유진하다 본인이 관리하던 금산(錦山=羅州)의 왕자대로 이거(移居)했을 것으로 추고한다.

(三國史記 眞聖王 6年 條/ 三國史記 甄萱 傳/ 三國遺事 紀異 卷2)

 

934년 8월, 왕자공 김흥광(金興光)의 손자 김 길(金 吉)이 고려국의 사신(使臣)으로 후당(後唐)에 갔으며, 935년 3월 견훤(甄萱)의 장남 신검(神劒)이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두 아우 양검(良劍)과 용검(龍劍)의 권유를 받아들여 능환(能奐) 등과 모의, 부왕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하고 금강을 죽인 다음 왕위에 올라 대왕(大王)이라 칭하였다. 같은 해 11월 12일 신라 경순왕(新羅 敬順王)이 개경(開京=開城)으로 올라와 귀부(歸附)하였으며, 이듬해인 936년 2월 견훤(甄萱)의 사위 박영규(朴英規)가 내부(內附)하기를 청하였고, 同年 6월에 견훤甄(萱)이 탈출하여 나주로 와서 왕건에게 투항(投降)하였다.

 

서기 936년 9월에 고려의 三軍이 일제히 進軍하니 神劒은 그의 아우 청주성주(靑州=晉州/城主) 양검(良劒)과 광주성주(光州城主) 용검(龍劒) 및 문무(文武)의 관료(官僚)와 함께 항복하였다.

(三國史記 卷50, 甄萱 傳/ 高麗史 卷2, 太祖 19年 條

 

 

 

 

[註 1]: 신무왕이 김명의 난을 피해 청해진 장보고에 의탁했다가 처자와 함께 (慶州로) 돌아 갈 때 아들 하나를 남겨두니 즉 흥광(興光)이다.

“神武王避金明之亂 王依淸海津時(並率妻子 而歸時) 留一子則興光”

(鷄林大譜, 慶州金氏譜, 永山金氏譜 參照)

[註 2]: 장보고 졸년에 대하여 『三國史記』권11에서는 846년(문성왕 8) 봄에 암살되었다고 하였으나, 『續日本後紀』卷 11 仁明天皇 承和9年 春 正月(842년 陰1月 10日) 에서는 841년 11월 중에 죽었다’고 하였으며,

엔닌(圓仁)이 쓴 『入唐求法巡禮行記』 권 4, 會昌 6년 7월 9일조에는, ‘장보고의 遣唐買物使로 활약하던 前淸海鎭兵馬使 崔暈이 국난을 만나 楚州 漣水縣 신라방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장보고의 피살 시기는 『續日本後紀』에서와 같이 841년 11월 중이었을 것이다.

[註 3]: 문성왕 13년(851) 2월, 청해진을 파하고 그곳 주민을 사천(徙遷)시킨 것은 청해진에 남아 있는 친 장보고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조치로 생각된다.

[註 4]: a) 棗溪亭 觀德亭 講禮軒 樓亭 冠帶亭 을 비롯, 平章一同의 촌토척지(寸土尺地)라도 모두 왕자공의 기물(器物)이라 하였으니 서일동(평장동)일대는 왕실의 賜給地였으며,

여러 건조물은 왕실의 지원으로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고한다

(平章洞遺墟序1471년 司憲府監察 金賢賚 撰 參照)

b)有安心寺 引月庵 棗溪亭 觀德亭 講禮軒 冠帶亭 今皆廢遺趾尙在」(光州邑誌 古跡 平章洞 참조)

[註5]: 삼국사기에 의하면 金立之는 憲德王 17년 (825)에 왕자 金昕을 따라 중국에 宿衛學生으로 파견되어 唐의 國子監에서 수학했으며, 崔致遠이 지은 「聖住寺 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에 의하면 별도의 聖住寺碑를 지은 것으로 되어 있고, 현재는 그 비로 추정되는 비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또 최치원의 비문에서도 그의 비를 언급하면서 翰林郞 金立之라고 하였으며「崇巖山 聖住寺事蹟』에서는 翰林郞 阿飡 金立之라고 적혀 있어 그의 관등이 阿飡이었음을 알 수 있다

[註6]: 추성군은 현재 담양군이다. 秋成郡 本百濟秋子兮郡 景德王改名 今潭陽郡 (『三國史記』 권36 地理 三)

[註7]: 김예(金銳)는 문성왕의 종제(四寸)로 문성왕 17년인 855년 4월,

창림사무구정탑 건립 때 선수조탑사 를 맡았는데 희강왕 손자인 응렴(경문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宣修造塔使宣修造塔使從弟舍知行熊州祁梁縣令金銳” (“昌林寺 無垢淨塔願記” 參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