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대 왕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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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맺는말(踏査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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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8일 정오에서 13시 30분 사이,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1구 ‘용산’마을에서 드디어‘왕자대’의 위치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날씨도 쾌청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일가 분은 서울에서 松洲(斗漢) 대종중고문 ․ 雲谷(哲泳) 대종중부유사 ․ 晟峰(壯潤) 보학연구가 ․ 그리고 부산에서 筆者가 참여하였고, 광주에서는 茶園(斞洙) 대종중고문 ․ 靜雲(一才) 대종중고문 ․ 直江(龍洙) 대종중고문 ․ 大原(重采) 대종중고문 ․ 綠泉(善述) 대종중 이사회의장 ․ 林堂(在漢) 상호군파 도청, 등 10인이었다. 미리 예정된바, 당일 11시에 광주역에 모여 준비된 차량에 분승하고 광주 남구의 월성동 일대를 답사하기 위하여 출발하였다.

가는 도중 차 내에서 綠泉일가로부터 오늘의 탐사계획을 설명 듣고는, 필자가 의견을 제시 하였다.‘월성’이나 ‘칠석’보다는‘용산’에서 확인될 가능성을 90%로 보고 있으니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서도‘용산’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이에 綠泉이「월성에 거의 이르렀으니 일단 내려 의견을 듣고 가자」하여 월성동 농협 앞마당에 이르러 필자가 준비하고 간 자료 “왕자대를 찾아서”를 농협에서 복사하여 晟峰일가가 준비한 자료와 함께 모두 나눠 갖고는, 바로 출발하여‘용산’마을 동쪽 입구에 이르니 길옆에 정자가 서 있는데,‘王坐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이 때 시각이 정오였다. 일행은 정자 마루에 올라앉아서 필자가 준비하여 가지고간 ‘대동여지도’와 ‘1925년에 제작된 이 지역의 옛 지도’ 그리고 ‘2000년도에 제작된 광주, 남평’의 현대지도‘를 펴 놓고, 간척 및 개간사업, 직강공사 등으로 주변지역의 변화된 부분과 준비된 텍스트자료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때에 뒤에서 누가 내 등을 도닥이는지라 돌아보니 大原일가께서 70세 초반의 학식 있어 보이는 한 어르신을 소개하였다. 「이분은 이 마을에서 여러 대를 사셨다하며, 마을 내력은 물론 노안면‘面誌’편집에도 참여하고 있다 하니 마을내력을 들어보자」하였다. 이에 수인사를 나누니 성함은 ‘田太熙’씨라 하였다. 몇 가지 여쭈어 보았다.

 

① 마을 정자를 ‘王坐亭’으로 한 이유를 물으니 ‘정자를 지은 목수가 별 뜻 없이 자기 생각대로 써다 붙인 것’이라 하였다.

② 산 이름을 물어보니 서슴없이 ‘왕자대’라고 대답하였다.

③ 이 산에 성터가 있는지를 물으니 ‘토성 테가 있다’고 하였다.

④ ‘왕자대’가 맞다 면서 왜 왕건의 진터로 보는지 등을 질문하였던바, 위의 ‘3항 속설’에서 소개된 ‘◎학산 1구 용산(龍山) 마을’에 전래되는 속설 내용과 꼭 같은 답변이었다.

 

이에 필자의 유인물 1부를 드리고는‘여기 註5)에 왕자대가 왕건의 진지로 잘못 전해진 이유’가 있으니 뒤에 정독하여 보시도록 권유하고는,「토성 테’를 볼 수 있도록 안내하여 주실 수 있습니까?」하니 흔쾌히 승낙하시고는 등산로 입구에 위치한 자택에 들어가 신발을 갈아 신고 나와서 일행을 인도하여주었다.

 

어르신의 안내에 따라 등정하는데, 해발 51.9m의 산 이지만 대나무 숲과 잡목이 무성하여 길을 헤치며 가는데 좀 힘이 들었으나 산정가까이에서 토성 터의 테두리가 분명하게 시야에 드러나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정상에 오르니 주위가 광활하여 3km전방의 월성동 앞의 학산 봉우리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또 산중턱에는 4단으로 된 나선형 말 훈련장이 있다고 하여 몇 분은 현장을 살펴보기도 하였다.

 

이 산을‘태매산’또는‘태미산’등으로 전래된 것은‘토성의 테두리(테)가 있는 뫼(산)’라는 뜻으로‘테뫼’의‘와음(訛音)’으로 여겨지며, 또 일명 치마봉(馳馬峰)이라고도 한다는데 아마도 말을 타고 달리며 조련한다는 뜻에서 유래한듯하다. 모두가 하산하면서부터는 내내 ‘왕자대’를 찾았다는 희열감에 들떠있었으나, 한편 정부의 4대강 정비사업과 관련하여 유적의 훼손방지 및 보존대책이 시급함을 공감하게도 되었다.

 

일행은 하산하여 田太熙씨에게 같이 점심 식사를 청하였으나 극구 사양함으로 서로 감사의 인사를 나누고 일행은 나주시내로 향하였는데, 나주신협 전무인 밀직사사공파의 容培일가가 답사에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점심을 제공하여 주었고, 여기서 유적보존대책에 대한 의견도 교환하였다. 우선 시급한 문제는 조속히 학술조사를 거쳐 사적지로서의 보존 가치를 인정받는 문제가 아닌가 싶다. 식사 후 유쾌한 마음으로 서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이 마을의 유래에 대하여는 앞에 2항의 7), 8)에 소개되어져 있다.>

아- 참으로 천지신명의 도움이 있음이었으리라! 돌이켜보면 이곳은 838년에 신무왕께서 反正의 대업을 위해 여기에 지휘소를 마련하여 장보고 ․ 김양 등과 함께 대업을 이루셨고, 892년 견훤이 후백제를 자칭함에 따라 王子公과 角干公(軾) 父子분께서는 다시 이곳에 진지를 구축하여 936년 후백제가 멸망하기까지 저항하던 곳으로서 그 연대를 추고하여보면, 父子분께서는 이곳에서 타계하신 것으로 여겨지니 부자분의 혼령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마도 일천년이 넘는 세월을 훌쩍 뛰어 넘어 이제 자손들이 그 유적지를 찾고자 이곳에 이르니 왕자공께서 반기셔서 이 마을 터줏대감인 田老人으로하여금 안내하도록 계시 하셨음이 아니겠는가?

 

끝으로 이번 방문을 통하여 중요한 증언과 현장 안내 등 적극 협조하여 주신 전태희 어르신께 깊이 감사드린다.

유적의 학술적 조사와 보존 관리문제에 대하여 시급히 대종중에서 응분의 조치가 있기를 기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