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대 왕조대

본문

3. 속설(俗說)

back.gif

 

◎ 학산리(鶴山里) 4)

나주군 복암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산리, 봉호리, 계림리, 용당 일부와 서부면의 동산리 일부, 또 광주군 마곡면의 용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학림과 용산의 이름을 따서 학산리라 하였고, 노안면에 편입되었다.

 

◎ 학산1구 용산(龍山) 마을

①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로부터 나주를 점거하기 위하여 이곳 태매산(또는 왕자봉, 치마봉)에 3일간 진을 치고 전쟁을 치뤄 나주를 점령하였다.

② 군사가 머물다간 왕조대가 있다하여 용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③ 또한 풍수지리상에 의해 이곳에 황룡부주(黃龍負舟)라는 명당이 있다하여 이름에'용(龍)'자를 넣어 용동(龍洞) 또는 용산 (龍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 학산2구 봉호(鳳湖) 마을

나루터 앞에 물이 잘나오는 샘이 있다고 하여 천동(泉洞)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다리가 가설되고 선착장은 없어졌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에 용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용바위골' 이라 불렸다고도 하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봉호(鳳湖)라 개칭되었다.

 

④ 마을에 전하는 주요 지명 이름

황룡부주: 마을 형국을 황룡부주라 하여 깊은 샘을 파지 못 했다고 한다.

서원앞들: 마을에 천동서원이 있다하여 마을앞 들녘을 이름 하여 부른다.

태미산3) : 마을뒷산으로 토성태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과거 가뭄이 심하게 들면 태미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 학산3구 학림(鶴林) 마을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마을 위에 울창한 송림이 있는데, 그 송림에 학이 많이 서식하고 있어 학림이라 부른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풍수 지리상 지형이 소나무에 학이 앉아 있는 형상이라 하여 학림(鶴林)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또 마을에는 예전부터 복바위라는 바위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 유래를 알 수 없고 그 형태마져 개울속에 잠겨 흔적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학산4구 동산(東山) 마을

⑤ 바다의 복어가 이곳에 와서 점을 받아 내려가야 참복이 된다하여 복암리 라 하였고, 마을 뒤에 오래된 바위가 있다하여 비석등이라 불렸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마을 뒤 동쪽에 산이 있다하여 마을이름을 동산(東山)이라 개칭하였다. 의 동산(東山) 마을의 복암리와 학림(鶴林) 마을의 복바위는 같은 지점인데도 서로 다르게 인용 된 듯하다.

 

향토답사 기록

<김경수의 ‘향토답사기록 -대동여지도와 함께하는 광주 이야기와 만남- 중에서>

 

◎ 왕조대와 왕자대

광주 땅에 ‘왕’자가 들어있는 곳이 있다. 용봉동에 전하는 ‘왕개’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 그 실마리를 풀어보기 위해 관련 증거를 더듬어 본다.

광주 서편 영산강 수로와 들판이 내려 보이는 둔덕산에는 후삼국 때 쟁패 흔적을 알려 주는 땅이름이 남아 있다.

 

그 중 고산자가 기록한 왕조대(王祖坮)와 왕자대(王子坮)가 관심거리다. 두 지명은 《대동여지도》에 선명하게 표기되어 있으며, 1864년 간행된 것으로 여겨지는 『대동지지』에도 설명이 나와 있다. 이 책에 따르면

⑥ 왕조대는 광주 서쪽30리에 있으며, 후백제 왕과 싸우던 고려 태조 왕건의 진터다.『읍지』를 살피면 남평천은 광주 서쪽 45리에 있는데, 왕자대5) 아래서 극락강과 합류한다.6) 정윤국은 1989년 펴낸 『나주목지』에 이 터를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봉호마을 뒤 해발 52m 봉우리로 비정했다. 광산구 용봉동 용동마을 서편 나주시 용산마을 동각에는 근래 붙인 ‘왕좌정’판이 걸려 있다.

 

⑦ 왕자대에 관한 『대동지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주 서남쪽 45리 지점에 왕자대란 성터가 있다.

이는 신무왕이 김양과 장보고의 힘을 빌어 반정을 도모한 곳이다.

남평현 동쪽 7리에서 지석강이 되고, 현 북쪽 3리에서는 성탄이 되어서 서쪽으로 흘러가다 왕자대 왼쪽에서 어천을 합하여 나주 경계에 이르러 영산강 상류가 된다.

정윤국은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동산마을 뒤 해발 37m 복바위로 보았다. 7)

 

 

 

2) 여기서 ①의 기록중 태매산(또는 왕자봉, 치마봉)이라는 구절로 보아서 이곳은 왕자대와 연관이 있음이 확실하거니와,  ‘왕건이 후백제로부터 나주를 점거하기 위하여 이곳 태매산에 3일간 진을 치고 전쟁을 치뤄 나주를 점령하였다.’ 함은 다음의 사료에서 보는바와 같이 ‘光州界’라는 용어를 ‘광주와 나주의 경계지역(용산)’으로 잘못 이해함으로서 속설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아진다.  

즉 ‘고려사’의 世家 태조편에 천복3년(903) 3월에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光州界에 이르러 금성군을 쳐서 이를 뺏고, 10여 郡 縣을 쳐서 취하였으며…’(率舟師 自西海 抵光州界 攻錦城郡 拔之 擊取十餘郡縣…)」라는 구절에서 ‘光州界’란 좁은 의미의 光州邑號가 아니라 넓은 地域 즉 全南地域의 境界를 뜻함이다.  以下

    고려사 世家 太祖紀, 梁 開平 3年 癸亥(909) 3月 條에 보이는  

         「‘수군을 거느리고 광주 염해현에 이르러…’(以舟師 次于光州塩海縣…)」

         「‘나아가 광주 진도군을 쳐서 이를 빼앗고…’(往擊 光州珍島郡拔之…)」

         「‘드디어 광주 서남계 반남현 포구에 이르러…’(遂至光州西南界 潘南縣浦口…)」등의 記錄들은

모두 廣域인 全羅南道를 뜻하는 용어 이다. 三國史記 卷36, ‘地理’에는 景德王이 ‘武州’로 고쳤는데 지금은 ‘光州’라 부른다 하였고, 大東地志에는 ‘옛 백제 땅을 景德王16年(757)에 全州와 武州의 2 州로 나누어 都督府를 두었다’ 하였으며, 高麗史 地理志의 海陽縣 條에는 ‘太祖 23年(940)에 光州로 改稱하였다’ 하였으나, 그 사이에도 武州(전남)의 別號로서 ‘光州’로 呼稱되고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왕건이 수군을 거느리고 나주를 치려면 목포 쪽에서 수로를 따라 공격하여야지 어찌 나주를 무사통과하여  용산에까지 이르러서 다시 후방에 위치한 나주를 역격하였단 말인가? 이는 어불성설이다. 다만 왕건이 나주점령 후 백마산진지를 구축하는 동안 왕자대에서 수일간 머물렀을 수는 있다. ②에서 ‘왕조대가 있다하여 용산이라 부른다.’ 하였으나, 용산은 이미 신라의 경덕왕 16년부터 용산현이 존재하였으니 이 또한 어불성설이고, ③또한 신라 때 ‘용산’이라는 마을 이름이 있기 전부터 전해오는 설화여야 하는데, 다분히 후대에 고려태조와 연계하여 전래된 설화로 느껴진다.

3) ④의 봉호마을의 뒷산인 용산에 성터가 있다하여 ‘태미산’이라 부른다 하였으니 이 성터의 흔적만 확인되면 이는 ‘왕자대’가 분명하다. ‘왕조대’에는 성터가 있다는 기록이 없다.

4) ⑤의 동산(東山) 마을의 복암리와 학림(鶴林) 마을의 복바위는 같은 지점인데도 서로 다르게 인용 된 듯하다.

5) 이는 위의 전거문헌 ‘여지도서’와 ‘호남읍지’에 보듯이 분명 ‘왕자대’로 기록되어져 있음에도『나주읍지』에서는 ‘왕조대’로 잘못 기록되어져 있다. 따라서 ‘왕자대’를 ‘왕조대’로 잘못 비정하게 된 원인으로 보아진다.

6) 앞의 註 5)에서 본바와 같이 ‘光州界’라는 용어를 ‘광주와 나주의 경계인 용산지역’으로 잘못 해석한데 따른 착오이거나, 아니면, 왕건이 워낙 걸출한 인물이어서 그에게 연결시키고자 하는 감성적 의도로 보아진다. ‘왕조대’는 ‘대동여지도’에 표시된바와 같이 백마산이 확실하며, 이는 왕건이 나주를 확보하고 난 뒤 조곡(租穀)의 집하소(集荷所)인 서창(西倉)을 확보함으로써 광주를 압박하기 위해 백마산에 전방진지를 구축하였을 것으로 보아진다.<졸고 ‘상계사의 고찰’ (2002. 4. 1)P58의 사료 이하 참고> 따라서 정윤국씨가 용산을 ‘왕조대’로 비정한 것은 잘못이다.

7) 위의 ⑦에서 왕자대를 비정함에 있어 정윤국씨는 용산을 ‘왕조대’로 잘못 추정함으로서 용산 외의 다른 지역에서 ‘왕자대’를 찾다 보니 불가피 동산마을의 ‘복암’일대를 ‘왕자대’로 추정하고 있으나, ‘왕자대에는 아직도 성 터가 있다.’ 하였으니 복암에는 성 터가 있었을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 각설하고 ‘용산’이든 ‘복암’이든 ‘성 터 흔적’만 확인이 된다면, 그곳이 바로 ‘왕자대’이다.

 

   -이상은 현지답사를 위해 미리 준비된 자료이고

    이하는 답사후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