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대 왕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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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왕자대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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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대 는 신라시대 김우징(神武王)이 서기836년 흥덕왕 사후(死後,) 부친인 김균정(金均貞)을 왕으로 옹립(擁立)하려다 실패하여 837년 5월 청해진(淸海津=완도)의 장보고(張保皐)에게로 가서 의탁(依託)하다가

 

서기 838년 1월 김명(金明)이 이홍(利弘)과 더불어 희강왕(僖康王)을 핍박하여 죽이고 왕이 되므로 김명(閔哀王)을 토살(討殺)[註 1]하기 위해 장보고의 도움으로 838년 12월 출병(出兵)할 때 유진(留陣)했던 처소(處所)였는데,

 

841년 장보고 사후, 신무왕자 김흥광(金興光:光山金氏 貫祖)이 이곳을 관리하며 머물다, 무주서일동(武州 西一洞=광주평장동)으로 가서 둔거(遁居)하던 중, 후백제의 견훤이 889년(892년)[註 2] 무주를 습취(襲取)하고 자립(自立)하므로

 

김흥광 은 부왕(父王)과 본인이 유진(留陣)했던 이 곳으로 옮겨와 살았기 때문에 왕자대 라 호칭(呼稱)하게 되었다. 왕자대의 위치는 현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용산마을 앞 산으로, 지금도 토성유지(土城遺址)가 남아있다.